정수는 바람이 불면 흙냄새부터 올라오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어릴 때부터 논두렁 뛰어다니며 큰 걱정 없이 자랐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부터는 밤마다 마음 한
편이 뒤척였다. 부모님이 농사일로 등골이 휘는 것을 보며,
“나는 도시로 나가서 번듯한 직장에 다니고, 부모님께 매달 용돈이라도 보내드려야지”
라는 결심이 자연스레 생긴 것이다.
그러나 시골에서 도시로 향하는 길은 늘 마을 어귀보다도 험했다.
정수는 졸업 후 바로 광역시로 올라갔다. 버스 창밖으로 키 높은 건물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할 때, 그의 가슴도 따라 부풀어 올랐다.
“나도 이제 도시 사람이다.”
간단한 짐을 들고 원룸에 들어서던 첫날,
그는 낯선 공기마저도 설레었다.
하지만 설렘은 며칠 못 갔다.
하루하루 취업 사이트에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보러 다녔다.
“저는 시골 출신으로, 성실함은 누구보다 자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할 때마다 면접관들은 어딘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경력이 없네요.”
“우리 업무는 좀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데.”
“엑셀 함수 정도는 다루실 줄 아시죠?”
질문들은 하나같이 정수를 움츠러들게 했다.
면접이 끝나고 건물 밖으로 나오면 깃발처럼 펄럭이던 그의 어깨는 축 늘어졌다.
“경력이 있어야 뽑히고, 뽑혀야 경력이 생기는 건데… 이걸 어쩌라는 거야.”
그는 커피 대신 편의점 900원짜리 물 한 병으로 목을 축이며 중얼거렸다.
처음 한 달 동안은 “이제부터 시작이다!”라며 웃고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달, 세 달,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자신이 점점 작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면접에서 떨어진 날이면 좁은 원룸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았다.
부모님과 통화할 때는 “잘 지내죠, 곧 좋은 소식 있을 거예요”라며 애써 웃었지만, 전화를 끊고 나면 입술이 달달 떨렸다.
어느 날, 면접을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유난히 바람이 세게 불던 오후, 인파 속에서 정수는 잠시 멈춰 섰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갔다.
정장은 잘 다려져 있었고, 구두는 윤이 났으며, 손에는 커다란 회사 로고가 박힌 가방이 들려 있었다.
그 모든 모습이 정수의 눈에는 마치 자신이 절대 도달할 수 없는 다른 세계의 존재들처럼 보였다.
“나는 왜 이리 뒤처진 걸까.”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만 마음속에서 되풀이되었다.
이력서 사진 속 자신의 모습도 점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초췌한 얼굴, 자신 없는 눈빛.
사진관에서 처음 찍었을 땐 환하게 웃었는데, 지금 보면 그 웃음이 민망하기까지 했다.
면접관들이 그 사진을 보고 무언가 판단했을까?
그는 불안과 상상으로 자신을 더 깊은 늪으로 끌어냈다.
그러던 어느 밤, 원룸 창밖에서 공사 소음이 울려 퍼졌다.
잠도 오지 않는 밤, 정수는 침대에 걸터앉아 혼잣말을 했다.
“그냥… 내려갈까.”
도시 불빛은 화려했지만, 그 불빛 아래 숨어 있는 그의 그림자는 너무 길고 피곤했다.
하지만 동시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또 있었다.
“이대로 돌아가면 난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거잖아.”
셋, 넷, 다섯…
며칠이 지나고, 정수는 SNS 구인글에서 ‘신입 가능, 교육 제공’이라는 문구를 발견했다.
간단한 전화 면접 후 바로 출근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작은 희망을 품었다.
“드디어 기회가 온 걸까.”
막상 출근해보니, 회사는 보험 판매 회사였다.
사무실은 작은 건물 한 층에 직원 열 명 남짓.
선배 직원은 환하게 웃으며 정수를 맞았다.
“다들 여기서 시작하는 거야. 조금만 버티면 금방 돈 벌 수 있어.”
하지만 첫 주부터 정수는 거리에서 낯선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야 했다.
대답도 없이 지나치는 사람들, 화를 내는 사람들, 피하듯 도망가는 사람들.
그의 농익은 성실함은 이런 거절의 파도 앞에서 무기력했다.
가끔 계약을 따내는 선배들을 보며 그는 생각했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계속 속삭였다.
“이건 내가 꿈꾸던 직장이 아니야.”
한 달이 지나도록 한 건도 계약을 따내지 못하자, 팀장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의 책상 위에는 성과관리표가 하루가 다르게 쌓였다.
“정수 씨, 노력에는 의심이 없지만… 이 일은 성과가 전부니까.”
그 말은 결국 정수를 옥죄는 서류 한 장, 퇴사권고서로 돌아왔다.
원룸으로 돌아가는 버스 창에 비친 그의 얼굴은, 도시로 처음 올라왔던 그날과 너무 달랐다.
기대와 자부심으로 가득 찼던 눈빛은 사라지고, 붉게 충혈된 눈만 남아 있었다.
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신발끈도 풀지 않은 채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를 감싸쥔 손이 떨렸다. 숨도 거칠었다.
그날 밤, 정수는 친구에게 술 한잔하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시골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 민우였다.
둘은 허름한 포장마차에 앉아 소주잔을 부딪쳤다.
“힘들지? 근데 이게 인생이래. 다들 속으론 울고 있어.”
민우의 말은 위로가 되고, 동시에 아프게 박혔다.
정수는 고개를 숙이고서 말했다.
“나, 뭐 하나 제대로 해낸 게 없어. 그냥… 허세였던 것 같아.”
민우는 술잔을 다시 채워주며 어깨를 툭 쳤다.
“야. 허세라도 품어야 움직이지. 너 아니었으면 도시 한 번 가보지도 못한 우리 선배들도 많아.”
정수는 눈물을 꾹 참고 술을 꿀꺽 삼켰다.
알코올이 아니라 서러움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며칠 뒤, 정수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컴퓨터를 켜고, 채용 사이트를 열었다.
손가락이 떨려도, 심장이 아파도, 눈물이 고여도 그는 다시 이력서를 수정했다.
자기소개서 첫 문장을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이렇게 적었다.
“실패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넘어지는 법을 배웠습니다.”
경력은 없었지만, 좌절 속에서 그가 얻은 것은 있었다.
거절을 견디는 법, 다시 일어서는 법, 그리고 자신을 믿는 법.
비록 당장 채용 연락이 올지, 또다시 불합격 통보를 받을지 알 수 없지만
정수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도시의 밤은 여전히 차갑고 높았지만
그가 다시 켠 컴퓨터 화면 속 불빛은
그 어떤 네온사인보다도 따뜻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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