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한 겨울, 독감이 쓸고 간 동네의 한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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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한 겨울, 독감이 쓸고 간 동네의 한 계절

올해 유난히 독하다는 독감이 찾아온 어느 겨울, 한 가족과 작은 동네가 겪어낸 긴 계절의 기록 같은 이야기.

겨울 독감 시즌 소소한 일상 드라마 가족과 동네 사람들

창문마다 서로 다른 사연이 숨 쉬는 겨울 밤, 이 도시에도 독한 독감의 계절이 서서히 내려앉고 있었다.

첫눈이 내리기 직전의 공기는 언제나 묘하게 차가우면서도 설렌다. 하지만 그해 겨울, 민수가 창문을 열어 맞은 찬 공기에는 설렘보다 알 수 없는 묵직한 불안이 더 많이 섞여 있었다. 아침 뉴스마다

“올해 독감, 10년 만의 강도”

라는 제목이 떠다녔고, 회사 단체 채팅방에는 독감으로 결근했다는 메시지가 하루가 멀다 하고 올라왔다. 누군가는 열이 사흘을 넘게 내리지 않는다 했고, 누군가는 병원 응급실에 서너 시간 서 있었더니 오히려 더 아픈 것 같다는 농담 아닌 농담을 남겼다.

민수는 모니터 앞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 삼키며, 슬며시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아내 지현에게서 온 메시지가 한 줄 떠 있었다.

“오늘 하윤이 반에서도 독감 걸린 애 둘 나왔다더라. 너도 마스크 꼭 쓰고 다녀.”

아직 사무실 안에서는 반쯤은 코로나 이전의 자유가 돌아와 있었고, 반쯤은 마스크가 일상으로 남아 있었다. 민수는 습관처럼 서랍에서 구겨진 마스크를 꺼내 펼쳐 보다가, 잠시 망설인 끝에 제대로 새 마스크를 꺼내 귀에 걸었다. 그때만 해도, 이 겨울이 자신의 기억 속에서 가장 길고도 뜨겁게 남을 거라는 걸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며칠 뒤, 도시를 향해 첫눈이 내려오던 날 밤이었다. 야근을 일찍 끊고 집으로 돌아온 민수는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몸이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머리가 묵직했고, 계단을 몇 층 오르지도 않았는데 숨이 가빴다. 거실에서 숙제를 하던 하윤이

“아빠 왔다!”

하고 달려오다가, 민수가 힘없이 신발 끈을 풀다 말고 현관 벽에 등을 기대는 모습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빠, 왜 그래?”

민수는 웃어 보이려 했지만, 입꼬리가 제대로 올라가지 않았다. 머릿속이 자꾸 흐려졌다. 지현이 부리나케 나와 이마에 손을 얹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단번에 굳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열이 너무 뜨거워서, 순간적으로

“괜찮겠지”

라는 희망보다 “이거 아닌데”라는 직감이 먼저 올라왔다.

“당장 병원 가자. 이건 그냥 피곤한 게 아니야.”

하지만 동네 병원 두 군데는 이미 문을 닫은 시간이었다. 야간 진료를 하는 큰 병원으로 가야 했고, 밖은 첫눈이 제법 쌓여 미끄러웠다. 민수는

“조금만 자면 괜찮을 거야”

라며 버티려 했지만, 기침이 쏟아지듯 터져 나오고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하자 결국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발이 더 거세진 골목길로, 마스크를 쓴 세 사람이 서둘러 걸어나갔다.

병원 대기실은 이미 겨울 독감 시즌의 풍경으로 가득했다. 털모자를 눌러쓴 아이들이 무기력하게 엄마 품에 기대 있었고, 회사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노트북을 무릎에 올려둔 채 연신 코를 훌쩍이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마스크 위로 드문드문 보이는 눈동자는 모두 비슷한 색을 띠고 있었다. 피곤하고, 지치고, 어쩌면 조금은 서로에게 미안한 듯한 표정.

“독감 검사 받으셔야 해요. 요즘은 감기보다 독감이 훨씬 많아서요.”

접수창구의 간호사는 거의 자동 재생되는 대사를 말하듯 차분하게 안내했다. 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길게 이어진 검사용 의자에 앉자마자, 그의 머리는 벽에 살짝 기대며 푹 떨어졌다. 귀에는 TV에서 쏟아지는 뉴스 소리가 들어왔다.

“올해 독감, 유행 시기 빨라져…”

“학교·직장 집단감염 우려…”

화면 속 그래프의 빨간 선은 작년보다 훨씬 가파르게 치솟고 있었다.

겨울밤의 병원 대기실은, 서로 다른 사연을 안고 모인 사람들의 기침과 한숨으로 가득했다.

검사 결과는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양성이었습니다, 하는 의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현의 머릿속에는 집 구조가 빠르게 그려졌다.

안방, 작은방, 거실, 주방, 그리고 하윤의 방. 민수를 어디에 눕히고, 하윤을 어디로 치워야 할지, 마스크와 소독약은 얼마나 남아 있는지, 회사에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독감이라는 두 글자는 단순한 병명이 아니라, 한 집안의 일상을 통째로 재배치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다행히 폐렴 소견은 아직 없지만, 열이 많이 높으니 약 잘 드시고 며칠은 무조건 쉬셔야 해요. 집에서도 최대한 분리해서 지내시고요. 요즘 이 독감, 생각보다 빨리 악화되는 분도 많습니다.”

의사의 말은 친절했지만, 동시에 얼음처럼 차가운 현실을 담고 있었다.

올 겨울의 독감은 단순히 한 번 앓고 지나가는 계절성 질환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과 마음을 동시에 흔들어 놓는 거대한 파도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눈발은 더 굵어져 있었다. 지하철 안에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제법 보였다. 서로 눈을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두꺼운 패딩 사이로 드러난 약 봉투와 체온계가 어쩐지 같은 계절을 통과하는 동지처럼 느껴졌다. 민수는 머리가 어지러워 눈을 감았고, 그 옆에서 지현은 조용히 그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하윤은 그런 부모의 모습을 보며,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두려움과 걱정을 한꺼번에 꿀꺽 삼키고 있었다.

안방은 즉시 민수의 격리 공간이 되었다. 창문을 살짝 열어 두고, 따뜻한 이불을 여러 겹 덮어 주고, 침대 옆에는 물과 휴지와 해열제가 줄지어 서 있었다. 지현은 매번 방에 들어가기 전 새 마스크를 쓰고, 나올 때마다 손을 오래 씻었다. 하윤은

“아빠 언제 나와?”

라고 물을 때마다 문 앞에서 멈춰 섰고, 문틈 사이로 겨우 목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아빠 금방 나올게. 하윤이랑 눈사람도 만들어야지.”

하지만 금방이라는 말은, 열이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는 동안 점점 더 멀어지는 약속처럼 느껴졌다. 새벽마다 민수의 기침 소리가 집 안을 구부러진 선처럼 가로질렀고, 지현은 그 소리만으로도 민수의 상태를 가늠했다.

기침이 조금 잦아든 날에는 안도의 숨을 쉬었고, 다시 거칠어지는 날에는 휴대폰으로 병원 상담 전화를 붙잡고 있었다.

문득, 이 겨울이 지나고 나면 도대체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오늘의 이 불안과 피로가 언젠가 “그때는 참 힘들었지” 하고 웃으며 떠올릴 수 있는 이야기가 되긴 할까.

얼마 지나지 않아, 동네 뉴스들도 달라졌다. 학원들이 임시로 휴강을 선언했고, 학교에서는 온라인 수업 전환을 검토한다는 공지가 날아왔다. 편의점 알바생이 독감으로 쉬게 되면서 밤에는 점포 문이 닫히는 날이 늘어났다. 택배 기사들 사이에서도 감염이 번져, 배송이 이틀씩 밀리는 일이 생겼다. 누군가는

“그냥 감기지 뭘 그렇게 난리냐”

고 말했지만, 그 말은 계속되는 기침과 두통 속에서 버티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지현은 독감이 퍼진 동네 풍경을 바라보며, 예전처럼 서로의 안부를 별 생각 없이 물어보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새삼 깨닫고 있었다.

창밖에는 첫눈이 쌓여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지만, 그 환호성 뒤에는 “감기 걸리지 마”, “손 깨끗이 씻어”라는 말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첫눈이 내려도, 올해 겨울 사람들은 조금 더 조심스럽게 서로의 거리를 지키며 걸어야 했다.

며칠 후, 안방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던 기침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열도 서서히 내려갔다. 민수의 목소리는 여전히 잠긴 상태였지만, 예전처럼 농담을 던질 여유가 조금씩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그는 침대에 기대 앉아,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하윤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하윤아, 아빠 나으면 뭐 하고 싶어?”

“응… 마트 가서 딸기 사 먹고 싶어. 그리고 아빠랑 같이 공원 가서 눈사람 만들고, 집에 와서 라면 끓여 먹고, 영화도 보고…”

하윤의 대답은 사소하지만 구체적인 장면들로 채워져 있었다. 민수는 그 장면 하나하나가 예전에는 별 생각 없이 흘려보내던 일상이었음을 떠올렸다.

딸기 한 팩을 들고 마트 계산대에 서 있던 순간, 공원에서 눈사람을 만들며 손이 시리다고 투덜거리던 시간, 라면이 끓는 동안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던 저녁. 그는 그 모든 순간이 얼마나 쉽게, 그리고 얼마나 소중하게 지나가 버렸는지를 비로소 깨닫고 있었다.

올해 독감이 “독하다”는 말은, 어쩌면 단지 바이러스의 강도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의 몸을 흔드는 것과 동시에, 그 주변 사람들의 일상과 마음까지 흔들어 놓는다는 의미일지도 몰랐다.

민수의 몸이 서서히 회복될수록, 동네에도 조금씩 다른 소식이 들려왔다. 심하게 앓던 이웃집 할머니도 한 고비를 넘겼다는 소식, 편의점 알바생이 다시 돌아와

“이제는 마스크 두 겹 쓰고 다닌다”

며 웃었다는 이야기, 학교 교장 선생님이 영상으로 아이들에게

“조금만 더 조심하고, 서로의 건강을 지켜주자”

고 인사를 전했다는 얘기까지. 모두가 이 겨울을 어떻게든 버텨내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어느 주말 오후, 민수는 아직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지만, 집 안에서 마스크를 쓰고 조심스럽게 거실로 나왔다. 하윤은 놀라서 눈을 반짝이더니, 바로 앞으로 뛰어나가려다 지현의 손에 살짝 잡혀 멈춰 섰다.

대신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머뭇거리는 공기가 흘렀다. 그 공기를 먼저 깬 것은 민수였다.

“우리, 그냥 이렇게 인사만 먼저 할까? 하이파이브 대신 공기파이브.”

민수와 하윤은 서로의 손바닥을 몇 센티미터 간격을 둔 채 마주 가져갔다. 공기 중에서 조심스럽게 마주친 손바닥은, 이상하게도 실제로 닿았을 때보다 더 뜨겁게 느껴졌다. 그 순간, 민수는 이 겨울을 잊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 계절이 남긴 것은 열과 기침만이 아니라, 서로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작은 약속들이기도 했으니까.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던 그 겨울의 저녁, 가족은 오히려 더 가까워지는 방법을 배우고 있었다.

겨울의 끝자락, 눈 대신 비가 더 자주 내리기 시작하던 어느 날, 민수는 오랜만에 혼자 동네를 걸었다. 회사에도 복귀했고, 몸도 거의 예전처럼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이전과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거리마다 붙어 있는 “독감 예방 함께해요” 포스터, 약국 유리창 뒤편에 가지런히 놓인 마스크 상자들, 그리고 입구에 나란히 놓인 손 소독제. 그는 예전이라면 그저 풍경의 일부로만 지나쳤을 물건들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보게 됐다.

동네 공원에 들렀을 때, 놀이터에서는 이미 아이들이 다시 뛰어다니고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아이들은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몇몇 부모들은 멀찌감치 떨어진 벤치에 앉아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민수는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며, 저 멀리서 하윤 또래의 아이가 눈덩이를 뭉치는 모습을 지켜봤다. 하늘에서는 아직도 겨울과 봄 사이를 맴도는 듯한 희미한 구름이 떠 있었다.

문득, 그는 이 계절이 끝났다고 해서 모든 것이 완전히 예전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됐다. 사람들은 아마 조금 더 오래 손을 씻을 것이고, 겨울이면 마스크를 쓰는 것이 자연스러운 습관이 될지도 모른다. 병원 대기실에서 느꼈던 불안과 피로는 쉽게 잊히지 않을 테고, 누군가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아”라고 말하면 이전보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이 먼저 들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민수는 이 겨울이 남긴 또 다른 선물도 알고 있었다. 아프지 않을 때의 일상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가족과 함께 밥을 먹고, 함께 TV를 보고, 함께 같은 방 안에서 숨을 쉬는 일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그 모든 것을 새삼스럽게 다시 배우게 해 준 계절이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민수는 지갑에서 작은 영수증 하나를 꺼내 접었다 펼쳤다. 며칠 전 약국에서 약을 사며 받은 영수증 뒷면에는, 약사님이 볼펜으로 적어 준 짧은 문장이 남아 있었다.

“너무 걱정 마세요. 겨울도, 독감도 결국은 지나갑니다. 남는 건 서로 챙겨 준 기억뿐일 거예요.”

그 문장을 떠올리며, 민수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올해 독감은 분명 독했다. 열도 높았고, 기침도 거세었으며, 동네 전체를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삶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그 독함을 통과한 사람들 사이에는, 이전보다 조금 더 단단해진 다정함이 남았다. 서로의 건강을 빌어 주는 인사들이 더 진심을 담게 되었고, 누군가 아프다고 말하면 “얼른 나아라”라는 말 뒤에 작은 행동 하나를 얹어 주려는 마음이 자라났다.

겨울의 끝에서, 민수는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 사이로, 아주 옅은 봄 냄새가 섞여 들어오는 듯했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버거웠던 열과 기침, 긴 대기실의 밤, 문틈 사이로 주고받던 말들, 공기파이브와 마트의 딸기, 눈사람과 라면 냄새까지. 그 모든 것이 한 계절의 이야기가 되어 가슴 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언젠가 이 겨울을 떠올릴 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그해 독감이 참 독하긴 했지. 그래도 그 덕분에, 서로를 조금 더 소중히 여기게 됐던 것 같아.”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이 길고도 뜨거웠던 겨울 역시 나름의 의미를 가진 계절로 남게 되지 않을까 하고.

이 글은 독감이 유난히 독하다고 불렸던 어느 겨울을 배경으로 한 가상의 이야기입니다. 실제 의료 정보나 치료에 관한 내용은 의료 전문가의 안내를 우선적으로 따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