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이 정도면 그냥 질러도 되는 거 아니야?”
거실 테이블 위에 노트북이 펼쳐져 있고, 화면에는 푸른 바다가 배경인 동남아 리조트 사진이 떠 있었다. 사람들은 수영장 가장자리에 누워 칵테일을 들고 있었고, 하얀 수건 위로 햇빛이 반짝였다. 민수는 마우스를 쥔 손가락으로 결제하기 버튼 근처를 맴돌다가 멈췄다.
옆에서 빨래를 개던 지연이 고개를 들었다.
“또 환율 보는 거야? 아까 봤잖아. 계속 보고 있다고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민수는 한숨을 길게 뱉으며 환율 그래프가 떠 있는 다른 탭으로 화면을 넘겼다. 그래프는 마치 산맥처럼 가팔랐다. 몇 달 전만 해도 평평하던 선이 어느새 가파른 능선이 되어 있었다.
“이게, 진짜 장난이 아니네. 우리가 처음 알아봤을 때보다 거의 십몇 만 원은 더 드는 거야. 항공권도 그렇고, 현지에서 쓸 경비도 다 달러로 환산되는 거니까.”
지연은 하얀 수건을 반으로 접다가 말고, 잠시 멈춰 서서 화면을 들여다봤다.
“그러게, 저 빨간 막대기 봐라. 왜 꼭 우리가 마음먹을 때 이러냐. 애들 어릴 때는 돈이 없어서 못 가고, 이제 좀 여유가 생기니까 환율이 날뛰네.”
둘 사이에 짧고 깊은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에는 지난 몇 년간의 시간이 얇게, 그러나 여러 겹으로 겹쳐져 있었다. 코로나로 미뤄 둔 가족 해외여행, 애들 대학 등록금, 사라져버린 주말 나들이의 습관, 그리고 이제 겨우 둘만의 여행을 다시 떠올릴 수 있게 된 나이.
민수는 모니터 옆에 놓인 독서 안경을 벗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우리 이번엔 가보자고 했잖아. 계속 미루다 보면, 어느 날은 몸이 안 따라줄 수도 있고…”
하지만 그 말 끝에는 자신 없는 웃음이 붙어 있었다. 환율 그래프는 숫자로, 동시에 감정으로 그들의 마음을 눌러 내리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출근 전 커피를 마시며 뉴스를 훑어보던 민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노트북 화면 왼쪽 구석에 띄운 포털 뉴스 첫 화면, 굵은 제목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달러 강세 이어지며 원화 가치 급락… 동남아 일부 환전소, 원화 취급 중단”
민수는 기사 제목을 한 번 더 읽고, 다시 한 번 더 읽었다. 기사 속에는 여행객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원화를 들고 갔는데, 환전해주는 곳을 찾기 위해 반나절을 헤매다 결국 높은 수수료를 감수하고 겨우 환전했다는 이야기, 예전과 다르게 원화를 받는 곳이 줄어들고 있다는 이야기.
“원화를… 안 받아?”
중얼거리며 기사 중간중간 표시된 그래프와 사진들을 내려보다가, 민수는 무언가 가슴 한가운데를 쿡 찌르는 느낌을 받았다.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익숙했던 세계의 기준이 조금 바뀐 것 같았다.
그때 주방에서 프라이팬에 지글지글 익어가는 달걀 소리가 났다. 지연이 앞치마를 두르고 고개를 내밀었다.
“여보, 빵 굽는 냄새 안 나? 또 휴대폰만 보고 있어?”
“휴대폰 아니고, 기사 좀 보고 있었어. 이거 봐봐.”
민수는 노트북을 돌려 지연 쪽으로 밀었다. 지연은 앞치마를 만지작거리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동남아에서 원화를 안 받아? 진짜야?”
“다 그런 건 아니래. 근데 예전 같지는 않다는 거지. 환율도 환율인데, 현지에서 환전하다가 시간 다 쓰겠다.”
지연은 입술을 꼭 다물었다. 그들 부부의 여행 계획은, 사실 좀 늦게 찾아온 사치에 가까웠다. 연애 초반에도, 신혼 초에도 해외여행은 늘 남의 이야기였다. 둘 다 시골 출신이라 집안에 보낼 돈이 항상 먼저였고, 아이들이 태어난 뒤에는 유모차와 젖병, 그리고 학원비와 학기초 등록금이 우선이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사치’도 운이 따라줘야 하는 거네.”
지연의 말에는 자조와 체념이 반씩 섞여 있었다. 환율, 기사, 그래프, 그런 단어들이 갑자기 너무 차갑게 느껴졌다.
민수는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며 말했다.
“오늘 회사 가서도 고민 좀 해야겠다. 항공권이야 카드 할부 돌리면 된다 쳐도, 현지에서 맘 편히 쓰지 못하면 여행이 무슨 의미냐 싶기도 하고.”
민수는 기사 속에서 “원화 취급 중단”이라는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보았다. 해외에서 한국 돈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 마치 자신이 어디선가 거절당한 것 같은 기분을 주었다. 그건 단순히 경제 뉴스가 아니라, 중년이 된 뒤 처음으로 조금 넉넉하게 자신을 위해 쓰려는 마음마저도 어딘가에서 “지금 아니야”라고 제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연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했다. 항공권, 숙박, 식비, 현지 투어, 기념품, 공항까지 가는 교통비까지. 원래 예상했던 총액에 요즘 뉴스에서 말하는 환율 상승분을 대충 더해보니, 문득 “이 돈이면 국내에서 얼마나 넉넉하게 놀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끼어들었다. 그 생각이 스스로 미워서, 그녀는 일부러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날 저녁, 식탁 위에는 김치찌개와 계란말이, 마른 멸치볶음이 반찬으로 올라왔다. 소박하지만 둘이 좋아하는 메뉴였다. 텔레비전에서는 여전히 환율 소식이 이어지고 있었다.
사회자의 목소리가 배경음처럼 흐르는 가운데, 민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여보, 우리 솔직히 얘기해보자. 진짜로, 이번에 동남아 가는 게 맞을까?”
지연은 숟가락으로 김치찌개 안의 두부를 천천히 건져 올렸다.
“회사에서 뭐래? 다들 그래도 간다던가? 아니면 줄줄이 취소하나?”
“젊은 애들은 그냥 가겠더라. ‘어차피 물가는 싼데요’ 이러고. 근데 나랑 비슷한 나이 애들은 표정이 다 애매하더라고. 그냥 아무 말 안 하는데, 다들 속으로는 계산하는 눈치야. 애들 학원비 생각하고, 대출 생각하고.”
지연은 피식 웃었다.
“우린 애들 학원비는 이제 없잖아.”
“대신 등록금이 있지. 둘 다 아직 완전히 독립한 거 아니잖아. 큰애 자취방 월세도 우리가 일부 보태주고 있고.”
지연은 잠시 고개를 떨구었다. 여행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리는 자신과, 통장을 생각하면 굳어지는 어깨가 동시에 존재했다.
“나도 가고 싶지. 솔직히 말하면, 예쁜 원피스도 하나 사놨어. 바닷가에서 입으려고.”
민수의 숟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진짜? 언제 샀어?”
“지난달에. 세일하길래. 거기 가면, 당신이 사진 많이 찍어준다 그랬잖아. 그래서 괜히 들떠서 하나 샀지 뭐.”
민수는 마음 한구석이 찌릿했다. 여권 사진을 다시 찍자며 스튜디오에 같이 다녀오던 날, 출국 전 면세점에서 괜히 커플 샌들을 맞춰보자던 농담이 떠올랐다.
“그 원피스… 그냥 이번에 국내 어디 가서 입으면 안 될까?”
말을 꺼내는 순간, 민수는 혹시라도 지연이 실망할까 봐 조심스러웠다.
“국내?”
지연은 그 단어를 입 안에서 굴려보았다. ‘국내’라는 말은 어쩐지 ‘타협’이나 ‘포기’ 같은 단어와 함께 따라붙는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오래전부터 미뤄두었던 또 다른 꿈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겨울 동해, 눈 덮인 산길, 오래된 시장과 노포 식당, 그런 것들.
“당신 진짜 괜찮겠어? 해외 대신 국내로?”
“솔직히 말하면, 당장은 좀 아쉽지. 공항에서 출국장 들어가는 기분, 나도 느껴보고 싶었으니까. 그래도 환율, 기사, 이런 거 다 보고 나니까 마음이 자꾸 불안해. 여행 가서까지 통장 걱정하는 건 싫어.”
민수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나름의 결심이 담겨 있었다.
결국 두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디로 가느냐’가 아니라 ‘무슨 마음으로 떠나느냐’였다. 환율이 오르고, 원화의 가치가 떨어지고, 세계 경제가 흔들려도 그들이 진짜 갖고 싶었던 건 “이 시기에도 우리는 우리를 위해 이런 시간을 냈다”는 기억이었다.
그날 밤, 지연은 거실 테이블에 커다란 종이 지도를 펼쳤다. 예전에 아이들과 전국 여행 계획을 세울 때 쓰던 지도였다. 가장자리는 조금씩 해져 있었지만, 곳곳에 펜으로 동그라미와 메모가 남아 있었다.
“여보, 우리 한 번 다시 짜보자. 해외가 아니면… 국내에서, 이왕이면 바다 보러 가는 걸로.”
민수는 소파에 앉아서 휴대폰을 만지다가 다가와 지도 옆에 앉았다.
“바다 좋지. 난 겨울 바다가 그렇게 좋더라.”
“그럼 동해? 서해? 남해?”
“겨울엔 역시 동해지. 파도도 세고, 색도 진하고.”
둘은 동해안을 따라 손가락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강릉, 속초, 양양, 동해, 삼척, 포항…
“우리, 예전에 애들이랑 강릉 갔을 때 있잖아. 그때 나는 좀 정신없었거든. 애들 챙기느라 바다는 제대로 못 봤어. 그때 숙소에서 아침 해 뜨는 거 보자고 했는데, 애들이 ‘피곤해’ 하고 안 일어나서 그냥 나 혼자 밥하고 있었잖아.”
지연이 웃으며 말하자, 민수도 그때를 떠올렸다.
“맞다. 그래서 우리 둘 다 숙소 창문으로 해 뜨는 거 한 번 쓱 보고 말았지. 사진도 제대로 못 찍고.”
“이번엔 우리 둘만 가는 거니까, 새벽에 깨워서라도 나가자. 동해 겨울 바다에서 해 뜨는 거, 제대로 한 번 보고 싶어.”
지연의 목소리는 어느새 살짝 들떠 있었다. 민수는 그 표정이 좋았다. 환율 그래프를 볼 때와는 다른 빛이 눈에 비쳤다.
“그럼 강릉으로 할까? KTX 타면 2시간 남짓이면 가잖아. 공항 가서 기다리고, 수속하고, 비행기 타고, 환승하고… 그런 거 다 생각하면, 오히려 여기가 더 가까운 ‘해외’일 때도 있을걸?”
“좋아. 그럼 강릉. 대신 조건 하나.”
“뭔데?”
“바다 보이는 숙소. 창문 열면 파도 소리 들리는 데. 그리고 내가 산 원피스, 거기서 입을 수 있는 곳.”
민수는 웃으면서 노트북을 다시 켰다.
“알겠습니다, 고객님. 바다 잘 보이는 숙소와 원피스가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카페까지 함께 찾아드리겠습니다.”
검색창에 ‘강릉 겨울 바다’, ‘동해 바다 뷰 숙소’를 차례로 입력하자 사진들이 쏟아져 나왔다. 누군가는 눈 내린 백사장을 걷고 있었고, 누군가는 두꺼운 패딩을 입고 파도 앞에서 커피를 들고 있었다. 화면 속 사람들의 볼은 추위에 빨갛게 물들어 있었지만, 표정은 따뜻해 보였다.
“이 숙소 어때? 거실이랑 침대에서 둘 다 바다가 보인대.”
“가격은?”
민수는 머쓱하게 웃었다.
“해외 리조트보다는 싸지. 환율 걱정도 덜하고. 대신 우리가 그냥 카드 한도에서 조금 넉넉하게 잡는 거야. ‘이번에야말로 우리 둘을 위한 여행이다’ 하고.”
지연은 화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하얀 침구와 큰 창문, 창밖으로 펼쳐진 겨울 바다. 상상만으로도 파도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좋다. 예약해.”
그 한마디가 떨어지는 순간, 이상하게도 가슴 속에 쌓여 있던 환율 걱정이 조금은 옅어지는 것 같았다. 목적지가 바뀌었을 뿐, 둘이 함께 어디론가 떠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강릉행 KTX 티켓과 숙소 예약이 모두 끝난 뒤에도, 민수는 가끔 항공권 예매 사이트를 켜보곤 했다. 이미 떠나지 않기로 한 동남아 항공권 가격을 괜히 다시 확인해보면서, ‘지금 결제해도 될 정도로 환율이 떨어지지 않았나’ 하는 헛된 기대를 품었다가, 곧 다시 창을 닫았다.
“아직도 미련 있어?”
어느 날 밤, 지연이 물었다. 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조금은. 그래도 한 번쯤은 가보고 싶잖아. 남들 다 간다는 동남아 휴양지.”
“그렇지. 나도 인스타에 올라오는 사진 보면 부러워. 다들 풀빌라 수영장 들어가서 떠다니는 조식 먹고, 노을 질 때 맥주 한 잔 찍고. 그런 거 보면 나도 해보고 싶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 침묵은 예전처럼 무겁지만은 않았다.
“근데 있잖아, 여보.”
지연이 말을 이었다.
“나는 우리가 ‘못 가서’ 국내 여행을 택했다기보다는, ‘지금 우리 형편에서 더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선택’을 찾았다고 생각하고 싶어. 환율이랑 기사 때문에 기분이 좀 상한 건 사실인데, 그렇다고 우리가 쫄려서 숨는 느낌은 싫단 말이야.”
민수는 그 말을 곱씹었다.
“맞아. 그래, 우리 지금 도망치는 거 아니지. 그냥, 우리 나름의 ‘가장 즐거울 수 있는 플랜 B’를 택한 거지.”
“그러니까 내일은 환율 생각하지 말고, 강릉 커피랑 회 생각만 하자.”
지연은 장난스럽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살짝 긴장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둘만 떠나는 여행이었고, 혹시라도 사소한 일로 싸우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다.
밤늦게 옷장을 열고, 지난달에 사두고 아직 한 번도 못 입어 본 원피스를 꺼냈다. 부드러운 천이 손끝에 스쳤다. 바다보다는 실내 카페에 더 어울릴지도 모르는 옷이었지만, 지연은 굳이 그런 생각을 접어두었다.
“내일 이거 입고, 그 바다 보이는 카페 가야지. 당신은 사진 잘 찍을 준비나 해.”
“나 요즘 폰 카메라 기능 공부했어. 인물 모드도 연습했다니까.”
여행 첫날 아침, 서울역 플랫폼에는 붉은 목도리와 검은 패딩이 뒤섞여 있었다. 캐리어를 끌고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민수와 지연도 각자의 짐을 한 손씩 쥐고 서 있었다.
“이상하다. 기차 타러 왔는데, 괜히 공항 온 기분이다.”
민수가 웃자, 지연도 따라 웃었다.
“그래도 좋다. 검사대도 없고, 신발 벗을 필요도 없고. 우리 나이에 이 정도 편안한 출국(?)이면 나쁘지 않네.”
스크린에는 강릉행 KTX 출발 시간이 안내되고 있었다. 복도에는 따뜻한 김이 피어나는 호빵 가게와 커피 냄새가 섞여 있었다.
민수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커피 두 잔과 따끈한 호빵 두 개를 샀다.
“환율 신경 안 쓰고 쓸 수 있는 돈이라 좋네.”
그는 일부러 웃으며 말했다. 지연도 그 말에 장단을 맞췄다.
“그러게. 카드값 문자 와도, ‘원화로 계산되었습니다’ 라고 뜰 거 아니야.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좀 편하다.”
기차에 올라타자, 좌석 옆 창밖으로 도시가 빠르게 뒤로 밀려났다. 겨울의 회색빛 건물들이 스르륵 흐르다가, 차츰 들판과 산으로 바뀌어 갔다.
“여보, 기사에서 봤던 거 기억나?”
기차가 속도를 올리자, 지연이 창밖을 보며 물었다.
“어떤 거?”
“원화 취급 안 한다는 그 기사. 그거 처음 봤을 때 나는 좀 서운했거든.”
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우리가 사는 나라 돈인데, 그걸 안 받겠다고 하니까. 마치, 우리가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된 느낌?”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꼭 그 나라들이 우리를 거절한 것 같지는 않아. 그냥 세상이 자기 속도로 변하는 거고, 우린 그 안에서 우리가 편한 선택을 다시 하는 거지. 너무 감정 이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더라.”
“역시 우리 집 경제 장관답네.”
민수가 농담을 건네자, 둘 사이의 공기가 한결 가벼워졌다.
창밖으로는 어느새 얼음이 부분적으로 낀 논과,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나무들이 보이고 있었다. 겨울 풍경은 차갑지만, 창 안쪽은 따뜻했다.
“우리, 나중에 환율 좀 안정되면 그때 해외 가자. 대신 오늘부터 강릉 여행 내내, ‘그래도 그때 해외 갔으면…’ 같은 말은 하지 말자.”
“좋아. 약속.”
둘은 마치 소리 나지 않는 건배를 하듯,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가볍게 부딪쳤다.
강릉역에 도착해 택시를 타고 숙소로 향하는 동안, 바다가 조금씩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잿빛 하늘 아래, 묵직하게 철썩이는 파도들이 멀리서부터 이어져 있었다.
숙소에 도착해 짐을 대충 풀고, 둘은 바로 바다로 나갔다. 찬 바람이 얼굴을 스쳤지만, 그 속에서 느껴지는 소금기 섞인 공기가 오히려 상쾌했다.
“우와, 파도 진짜 세다.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지연은 목도리를 조금 더 고쳐 매며 파도 앞으로 다가갔다. 모래 위에는 발자국이 듬성듬성 찍혀 있었고, 멀리 서핑을 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나도 한 번 찍어줘.”
지연이 조심스레 원피스를 코트 안에서 슬쩍 드러냈다. 바닷바람에 살짝 흔들리는 치마 자락 위로 햇빛이 은근하게 내려앉았다.
민수는 휴대폰을 꺼내들고 진지하게 구도를 잡았다.
“잠깐만, 파도 저 끝까지 들어오면 딱 예쁘겠다. 하나, 둘… 지금! 웃어!”
셔터 소리가 몇 번 연달아 났다. 지연은 얼어붙은 손을 비비며 호호 불었다.
“나 어떻게 나왔어? 주름 너무 많이 보이면 안 된다.”
민수는 사진을 확대해서 보여주었다.
“주름은 좀 보이는데, 그게 예쁜데?”
“말은 참. 그래도 필터 좀 씌워줘. 우리 딸이 보면 또 ‘엄마, 요즘 필터 안 쓰는 사람 어딨어’ 할걸.”
둘은 파도 소리 위로 겹치는 서로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해외의 푸른 수영장이 아니어도, 이 겨울 바다는 충분히 아름다웠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한참을 걷다가, 민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보, 솔직히 말해도 돼? 나… 환율보다 사실 더 걱정됐던 게 있어.”
“뭔데?”
“내 체력. 해외 나가면 비행기 타고, 시차 적응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젊었을 때처럼 하루 종일 걷다가 밤에 또 술 마시고 그럴 수 있을까 싶더라. 괜히 내가 먼저 지쳐서, 당신까지 지치게 할까 봐.”
지연은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파도 대신 그의 손을 살짝 잡았다.
“그럼 더 잘했네. 우리 지금 이렇게 천천히 걷고, 힘들면 카페 들어가서 쉬고, 또 걷고. 바다는 도망 안 가니까.”
숙소로 돌아와 찍은 사진들을 넘겨 보다가, 지연은 하나의 사진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이거 봐. 우리 둘이 같이 나온 사진. 예전에 애들이 찍어줬을 땐 항상 한 명은 눈 감고 있어서 망했었잖아.”
사진 속에서 둘은 바다를 등지고 나란히 서 있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흰머리가 조금씩 보였고, 웃는 눈가에는 확실한 주름이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어쩐지 젊은 시절보다 더 편안해 보였다.
둘째 날 아침, 숙소 창문으로 붉은 해가 떠오르는 것을 바라보며, 지연이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말했다.
“여보, 우리 그래도 언젠가는 가자. 진짜로. 동남아든 어디든.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이 바다를 기억하면서 또 다른 바다를 보러 가는 거지.”
“응. 근데 그때가 오기 전에… 이렇게 국내 여기저기도 더 다녀보고 싶다. 강릉도 좋고, 다음엔 남해도 가보고 싶고. 굳이 멀리 가야만 ‘특별한 여행’이라는 생각, 요즘 조금씩 덜어지는 것 같아.”
“우리 나이에는, 특별한 건 풍경보다도 ‘함께 있는 시간’인지도 몰라.”
지연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파도는 여전히 규칙적으로 밀려왔다 밀려갔다. 환율도 언젠가는 다시 내려갈 것이고, 또 다시 올라가기도 할 것이다. 원화의 가치는 달라질 수 있지만, 적어도 이 순간 둘이 나누는 대화와 웃음은 숫자로 계산되지 않는 어떤 것이었다.
“당신, 그 기사 링크 아직도 폰에 있어?”
“응. 왜?”
“나중에, 우리가 진짜 해외 갈 때쯤에 한 번 다시 열어보자. 그때는 또 어떤 뉴스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사이에도 우리는 우리 삶을 이렇게 조금씩 잘 살아냈구나, 하고 확인하는 용도로.”
민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좋다. ‘원화 안 받아준다’는 기사 보고도, 원화로 국내 여행 잘 다녀온 부부의 기록이랄까.”
여행 마지막 날, 돌아오는 KTX 안에서 둘은 나란히 앉아 사진을 정리했다. 바다, 카페, 시장, 골목, 저녁 하늘, 그리고 서로의 얼굴.
“생각보다 많이 웃었네, 우리.”
지연이 사진을 넘기며 말했다.
“그러게. 솔직히 처음엔 ‘해외 못 가서 어쩔 수 없이 국내 온 사람들’ 느낌일까 봐 걱정했는데, 막상 와 보니까 그런 생각 별로 안 들더라.”
“맞아. 돈 쓰는 것도 훨씬 마음 편했고. 내가 괜히 환율 앱 들락날락하면서 스트레스 받는 대신, 그냥 이 여행 동안 쓸 예산을 원화로 딱 정해놓고 쓰니까 훨씬 편했어.”
창밖으로 도시의 불빛이 다시 가까워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약간의 아쉬움과 안도의 감정을 동시에 데려왔다.
“여보, 우리 다음에 또 어디 갈까?”
“벌써 다음 여행 얘기야?”
“그러니까 좋잖아. 예전에는 여행 한 번 다녀오면 ‘또 언제 오냐’ 이랬는데, 이번에는 ‘다음엔 어디 가지’라는 말이 먼저 나오네.”
민수의 말에, 지연은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그러네. 아마도 이번 여행이 ‘감당 가능한 사치’라는 게 어떤 건지 조금은 알려준 것 같아. 무리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를 위해 기꺼이 쓸 수 있는 돈, 그리고 내 몸이 버틸 수 있는 만큼의 일정.”
열차가 서울역에 가까워졌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짐을 정리하며 민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창밖을 바라보았다.
“나, 이제 ‘환율 때문에 못 간 여행’이라고 생각 안 하려고.”
“그럼 뭐라고 생각할 건데?”
“‘우리에게 딱 맞는 타이밍으로 찾아온 국내여행’이라고.”
지연은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 말 안에는, 조금 늦게 찾아온 여유와, 여전히 진행 중인 삶,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언젠가’에 대한 희망이 모두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집에 돌아온 뒤, 민수는 습관처럼 환율 앱을 켰다가, 곧바로 껐다. 그 대신 사진 앨범을 열고, 강릉 겨울 바다 앞에서 찍은 지연의 사진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원화의 가치는 숫자로 오르내리지만, 함께 보낸 시간의 가치는 생각보다 느리게, 그리고 깊게 쌓여간다는 것을 이번 여행이 조금은 알려준 것 같았다.
언젠가 또 다른 바다, 또 다른 공항, 또 다른 도시가 그들을 부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이 오기 전까지, 그들은 환율 그래프 대신 서로의 얼굴을 더 자주 바라보며 살아가기로 했다.
그렇게, 달러 환율이 올라간 어느 겨울, 한 중년 부부는 해외행 비행기 대신 국내행 기차를 택했고, 그 선택은 생각보다 훨씬 따뜻한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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