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맨 위로 테무 새벽배송이 온 도시를 흔들던 밤 택배 현장에 있는 한 사람의 눈으로 바라본 새벽배송 논란, 그리고 그 속에서 뒤늦게 깨어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 #테무 #새벽배송논란 #택배기사이야기 #플랫폼전쟁 “알람 안 맞춰도 돼. 테무에서 시키면 새벽에 온다던데?” 어느 겨울 저녁, 서울 변두리의 작은 빌라 거실에서 지연은 농담처럼 말하고 곧바로 스마트폰 화면을 넘겼다. 화면 안에는 형형색색의 상품 썸네일과 믿기 힘든 가격, 그리고 눈에 확 들어오는 한 줄이 있었다. 오늘 23시 59분 이전 주문 시, 내일 새벽 도착. 옆에서 라면을 먹던 남편 민수는 젓가락을 멈추고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몇 년째 플랫폼 개발자로 일하다가 최근 구조조정에 휘말려 계약직으로 전환된 그는, 숫자와 구조에는 빠삭했지만 변화의 속도에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새벽배송? 저 가격에? 저 배송비에? 그의 머릿속에서는 자동으로 물류 네트워크와 인건비, 창고 운영 비용이 떠오르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의외로 단순했다. “와, 진짜 싸다. 근데… 저걸 누가 배송하지?” 그 시각, 도심 외곽의 물류센터에서 준호는 바코드 스캐너를 쥔 채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손등을 타고 흐르는 땀은 차가웠지만, 숨결은 뜨거웠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동네 마트의 배송 기사였다. 점장은 친근했고, 단골 손님들의 안부를 물으며 일하는 맛이 있었다. 하지만 대형 플랫폼과 가격 경쟁에서 밀린 동네 마트는 문을 닫았고, 그는 더 큰 물류회사로 옮겼다가, 다시 최근 들어 외국계 플랫폼과 계약한 배송 대행 업체로 옮겨왔다. “오늘 테무 물량 또 늘었대.” 동료 기사가 툭 던진 말에 준호는 고개를 돌렸다. 파란색, 주황색, 초록색, 그리고 이제는 생소...

눈이 펄펄 내리던 그날, 산에서 살아 돌아온 청년들

눈이 펄펄 내리던 그날, 산에서 살아 돌아온 청년들
맨 위로
눈이 펄펄 내리던 그날, 산에서 길을 잃은 청년들

2025년 겨울, 한 번의 산행이 서로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깊은 눈 속에서 서로를 붙잡고 버틴 네 청년의 긴 하루와 긴 밤의 기록.

2025년 겨울 조난 설산 청년들 생존기
배경: 강원도 깊은 산, 2025년 어느 눈 내리던 날 기온: 영하 15도, 체감 영하 20도 아래 등장인물: 준호 · 민재 · 수빈 · 다영

그날 눈은, 그들이 서울을 떠날 때만 해도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세상을 덮어버리고 있었다. 가벼운 설경을 기대하며 떠난 산행은, 점점 발목을 묶어 오는 눈더미 사이에서 생존을 건 싸움으로 변해 갔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는,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들이기 시작한 네 명의 청년이 서 있었다. 설렘과 불안, 책임과 두려움이 뒤엉켜 있던 20대의 겨울이, 생각보다 훨씬 험한 모습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눈 덮인 겨울 산 풍경

2025년 1월의 어느 토요일 아침, 미세먼지 예보 대신 폭설 예보가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하지만 약속은 이미 오래전에 잡혀 있었고, 일주일 내내 야근에 치였던 그들에게 산은 잠깐이라도 현실을 벗어나 숨을 고를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처럼 느껴졌다.

“야, 이 정도 눈이면 오히려 더 예쁜 거 아냐? 사진 맛 제대로 나겠다.”

민재가 지하철 계단을 뛰어올라오며 숨을 헐떡였다. 목에는 카메라가 매달려 있었고, 가방에는 여분의 배터리와 렌즈가 빼곡했다.

“사진 맛보다 우리 체력부터 좀 챙기고요.”

수빈이 목을 감싼 넥워머를 추켜올리며 웃었다. 대학 때까지 산악 동아리에서 활동했던 그녀는, 네 명 중 가장 등산 경험이 많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캐리어 같은 커다란 배낭을 메고 서 있던 준호가 손을 흔들었다. 그 옆에서 털모자를 눌러쓴 다영이 연신 입김을 호호 불며 말했다.

“아, 진짜 춥다… 난 왜 이걸 따라온 걸까. 나 오늘 집에서 드라마 정주행하려고 했는데.”

“너가 먼저 가자고 했거든. 신년운세에 큰 산을 오르면 마음속 짐이 내려간다나 뭐라나.”

준호가 웃으며 말하자, 다영은 눈을 흘겼다.

그렇게 네 명은 약속된 듯 서로를 한 번씩 바라보고 웃은 뒤, 강원도 작은 산으로 향하는 시외버스에 올랐다. 버스 창가에 부딪히는 눈송이는 점점 굵어졌고, 창밖으로 보이는 도로의 흰빛은 조금씩 두꺼워지고 있었다.

그 누구도 그때는 몰랐다.

“사진 한 장 더 찍자”

라는 말이 구조대의 출동 시각을 늦출 줄,

“조금만 더 올라가 보자”

라는 농담이 서로의 생사를 가를 선택이 될 줄.

산 입구에 도착했을 때, 눈은 이미 발목 위까지 쌓여 있었다. 나무들은 흰 옷을 껴입은 듯 묵묵히 서 있었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차가운 공기가 폐 깊숙이 파고들었다.

“생각보다 많이 오네… 그래도 등산로는 잘 보이네?”

준호가 아이젠을 조심스럽게 착용하며 말하자, 수빈이 그에게 다가와 밴드를 더 단단히 조여 주었다.

“내려올 때가 더 위험하니까, 올라갈 때부터 신발 단단히. 알지?” “네, 선생님.”

다영은 핫팩을 양손에 쥐고 꾹꾹 누르며 말했다.

“정상까지만 갔다가 바로 내려오는 거지? 눈 더 심해지면 나 그냥 중간에서 카페 찾아갈 거야.”

민재가 카메라를 들어 네 사람을 교대로 찍었다. 저마다 다른 웃음이었지만 모두 눈빛만큼은 밝았다. 산 아래에서의 그 웃음이, 몇 시간 뒤엔 간절한 기도가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초반의 산행은 의외로 즐거웠다. 눈이 푹신하게 내려앉은 등산로는 발자국마다 고유의 소리를 냈다. 사각, 사각, 그리고 다시 사각. 도시에서 듣던 자동차 소리도, 카페에서 새어 나오던 음악도 이곳엔 없었다. 대신 숨소리와 발자국, 그리고 부서지는 눈의 속삭임만이 귀를 채웠다.

“야, 여기 진짜 예쁘다. 잠깐만, 여기 서봐.”

민재는 나무 사이로 떨어지는 희미한 햇빛과 가느다란 눈발이 교차하는 공간을 발견할 때마다 네 사람을 세웠다.

다영은 투덜거리면서도 포즈를 취했다. 눈송이가 머리카락과 속눈썹에 달라붙을 때마다 그녀는 얼어붙은 손으로 조심조심 털어냈다.

“사진 잘 나오면, 이 고생도 기억 미화되는 거 알지?”

민재의 말에 준호가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 이 사진 보면서, 우리 이때 진짜 아무 걱정 없었다… 이러겠지?”

수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걱정 많았지. 취업, 집세, 미래, 인간관계… 다만, 지금은 이 눈이 그걸 잠깐 가려주고 있을 뿐.”

“설산이 좋은 이유는 말이야, 내 발자국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 같아서야.”

수빈이 그렇게 말하자, 모두 잠시 말을 멈추고 눈밭을 바라보았다. 흰색 위에 쌓여 가는 그들의 흔적. 그 발자국들이 나중에는 구조대의 유일한 단서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아직 모른 채 한 발, 한 발 더 높이 올라갔다.

겨울 산행에서 눈이 많이 내리기 시작하면, 하산 시간을 평소보다 훨씬 더 일찍 잡아야 한다는 것을 그들은 책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책으로만 아는 지식은, 실제 눈보라 속에서 너무 쉽게 무너진다는 것도.

정오 무렵, 하늘이 한층 더 낮아졌다. 눈발은 가늘게 내리던 상태에서 굵어지더니 마치 누군가 위에서 베갯속을 찢어 내리는 것처럼 펄펄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슬슬 돌아갈까?”

준호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지만, 민재는 카메라를 가슴팍에 품고도 쉽게 내려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정상 조금만 더 가보자. 지도 보니까 그렇게 멀지도 않던데?”

수빈이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은 점점 방향을 잃고 마구 휘날리고 있었다. 나무의 윤곽이 흐려지는 속도가 빠르다는 것이 그녀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지금 내려가도 솔직히 만만치 않을 거야. 그래도 너희 셋 다 괜찮으면, 시간 딱 삼십 분만 더 보고, 그때 상황이 애매하면 바로 돌아가자.”

서른 분. 나중에 구조대원에게 이 말을 들려주었을 때, 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비슷한 말을 했다.

“겨울 산에서 서른 분은 생각보다 길어요. 때론, 예상보다 너무 긴 시간이지요.”

그 말이 떠오르기 전까지, 네 사람에게 서른 분은 사진 몇 장 더 찍을 수 있는 시간, 조금 더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는 시간에 불과했다.

눈보라는 예고 없이 강도를 높였다. 바람은 갑자기 방향을 틀며 귓가를 후벼팠고, 내리던 눈들은 빗줄기처럼 사선으로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야, 이거 장난 아닌데? 안 보인다…”

다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눈발에 시야는 점점 좁아지고, 나무와 바위의 경계는 흐릿해졌다.

그들이 서 있던 지점은 등산로가 조금씩 갈라지는 곳이었다. 눈이 모든 표시를 덮어 버린 탓에 어디가 주 등산로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수빈이 배낭에서 지도를 꺼냈지만, 거센 바람이 종이를 뒤흔들어 제대로 펼치기도 힘들었다. 휴대전화 지도는 이미 신호가 약해지고 있었고, 산속 깊은 곳이라 GPS도 정확하지 않았다.

“잠깐만, 다들 멈춰. 한꺼번에 움직이지 말고.”

수빈의 목소리는 최대한 침착했지만, 옆에서 듣고 있던 준호는 그녀의 눈가에서 미세하게 떨리는 긴장을 읽을 수 있었다.

바람 사이로 이상한 소리가 섞여 들렸다. 처음엔 눈이 나뭇가지를 때리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곧 그것이 발 밑 어딘가에서 나는 낮은 ‘우르르’ 하는 울림임을 알아챘다.

“눈사태…?” 민재가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그 말이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순간, 멀리서부터 낮고 둔탁한 소리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서서히 움직이는 듯한 소리. 그리고 눈 덮인 비탈면 어딘가에서 눈더미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

“몸 낮춰! 나무 쪽으로 붙어!”

수빈이 외침과 동시에 네 사람은 반사적으로 몸을 낮추고, 근처에 보이는 나무를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눈사태는 그들의 바로 위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멀지 않은 능선 너머에서 무너져 내린 눈더미가 다른 눈들을 건드리며 연쇄적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진동은 발 밑까지 전해져 왔고, 흩날리던 눈발 사이로 하얀 먼지 구름이 피어올랐다. 날카로운 공포가, 서서히 그들의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그 순간부터 그들은 더 이상 “사진 찍으러 온 친구들”이 아니었다. 자신이 서 있는 땅이 언제든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현실을 마주한, 한낱 작은 생명체에 불과했다.

눈사태의 직접적인 피해를 피한 것은 다행이었지만, 그 대가로 그들은 방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시야를 가린 눈구름이 조금씩 가라앉자, 자신들이 서 있던 곳이 더 이상 익숙한 등산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 우리 아까 지나왔던 길 맞아?”

다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나무들은 모두 비슷해 보였고, 발자국은 눈사태의 진동과 새로 쌓인 눈에 지워진 지 오래였다.

“일단 내려가자. 정상은 포기하고, 최대한 낮은 곳으로.”

수빈이 그렇게 말했지만, ‘내려간다’는 것이 어떤 방향을 향한 것인지 그때부터는 장담할 수 없었다.

눈은 계속 내렸다. 말 그대로 ‘펄펄’ 내렸다. 머리 위에서 흘러내린 하얀 세계는 위와 아래, 왼쪽과 오른쪽의 감각을 모두 뭉개 버렸다.

한 시간이 지났을까, 두 시간이 지났을까. 시간의 감각은 추위와 공포 속에서 서서히 흐려졌다. 휴대전화 배터리는 추위 때문에 급격히 줄어들었고, 신호는 잡히지 않거나, 잡히더라도 통화 연결이 되지 않았다.

“119에 한번이라도 위치 전송해 보자. 신호 조금이라도 잡힐 때.”

준호가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를 꺼냈다. 화면 위 숫자들은 터치할 때마다 미끄러지는 느낌이었다.

다행히도 잠깐의 신호가 잡히며 문자 한 통이 나갔다. [현재 추정 위치, 폭설 속 조난, 네 명] 정확한 좌표를 담지는 못했지만, 그 문자 한 통이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의 끈처럼 느껴졌다.

“보냈어… 갔을까?” “분명 갔을 거야. 우리, 그때까지 버티기만 하자.”

하지만 버틴다는 말은 말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해는 이미 구름 뒤로 기울어가고 있었고, 눈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잦아들 때마다 그들은 주변을 둘러보며 바람을 덜 맞을 수 있는 지형을 찾았다. 그러다 발견한 곳은, 산비탈 중간에 자리한 작은 움푹 파인 지형이었다. 나무와 바위가 적당히 둘러싸고 있어 바람을 어느 정도 막아 줄 수 있을 듯 보였다.

“여기서… 오늘 밤을 버티자.”

수빈의 말에, 모두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밤까지 여기 있다고? 구조 오겠지. 그 전에…”

다영의 목소리는 떨리다가 이내 끊겼다.

수빈은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산악 구조대가 바로 출동했다 해도, 이 눈 속에서 우리 찾는 데는 시간이 걸려. 그리고 이런 날씨엔 헬기도 못 떠.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체력을 아끼고 서로의 체온을 나누면서 버티는 거야.”

그 말은 잔인했지만, 동시에 가장 솔직한 말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오늘 안에 내려가야 하는 등산객”이 아니라, “오늘 밤을 살아 내야 하는 조난자”가 되어 있었다.

네 사람은 움푹 패인 곳 안쪽에 자리를 잡고 눈을 파내어 바닥을 조금이라도 평평하게 만들었다. 방수 돗자리를 깔고, 남은 옷과 비상담요를 꺼내 서로의 어깨에 둘렀다.

핫팩은 한정적이었다. 그들은 남은 개수를 세어 본 뒤, 하나씩 꺼내며 말없이 손과 발, 가슴팍에 나누어 붙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그렇게 아끼지 말고 좀 더 나 자신에게 잘해줄 걸 그랬네.” 다영이 갑자기 중얼거리듯 말했다.

“너 평소에도 잘하고 살았어.”

준호가 웃으며 말했다.

“아니, 진짜로. 너 되게 열심히 사는 거, 다 알고 있어. 우리 셋만 안다 생각하지 마.”

그 말에, 다영의 눈가에 눈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엉겨 붙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사실… 이 산행, 진짜 기분 전환하러 온 거였어. 회사에서 실수한 거 아직도 계속 생각나고, 집에 가면 그 생각만 나니까… 숨통 좀 트이고 싶어서.”

“나도.”

민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요즘 사진 찍으면서도, 이게 직업이 될 수 있을까, 내가 계속 이걸 해도 될까… 그런 생각만 했거든. 근데 오늘은 그냥, 아무 생각 안 하고 눈만 보고 싶어서 따라온 거였어.”

수빈은 그 말을 듣고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솔직히 말하면, 책임감 있는 척했지만 산이 그리웠어. 대학 때처럼, 아무 생각 없이 올라오면 뭔가 해결될 것 같았거든.”

그리고 마지막으로, 준호가 입을 열었다.

“난… 그냥 무기력해서. 뭐든 계획을 세워도 잘 안 풀리고, 남들만 앞질러 가는 것 같아서, ‘그래, 산이나 가자’ 하고 나온 거였어.”

“도망치듯 올라온 산에서, 우리는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는 상황을 맞이했다.”

해가 완전히 저물자, 눈 덮인 산속의 어둠은 도시의 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다. 가로등도, 자동차 불빛도 없었다. 오직 희미한 헤드랜턴 빛과, 눈 위에 반사되는 미미한 빛만이 그들의 얼굴을 비췄다.

추위는 점점 날카로워졌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근육이 경련을 일으킬 것 같았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으면 또 다른 위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체온증.

“얘들아, 졸리면 안 돼. 졸리다고 느껴지면, 서로 깨워 주기.”

수빈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람은 최대한 몸을 붙였다. 어깨와 등, 무릎이 서로의 체온을 나누었다. 숨을 쉴 때마다 입김이 하얗게 피어올랐다가 금방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 살아서 내려가면 뭐 할래?”

민재가 어둠 속에서 물었다.

“난… 사표 안 쓸래.”

다영이 먼저 말했다.

“요즘 진짜 아무 생각 없이 사표 버튼만 들여다보고 있었거든. 근데, 아까 눈사태 소리 들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게 그거였어. ‘아, 사표는 안 쓰고 죽네’ 하는 생각.”

모두가 피식 웃었다. 웃음은 짧았지만, 그 짧은 웃음조차도 몸을 조금 따뜻하게 해주는 듯했다.

“난 사진전을 열 거야.”

민재가 말했다.

“전문 사진가도 아니고, 누가 와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가 지금까지 찍은 사진들 한 번쯤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어.”

“나 그거 보러 갈게.”

준호가 바로 말했다.

“그리고 난… 미루던 시험 접수부터 할 거야. 떨어지더라도, 안 해보고 후회하는 건 이제 그만하려고.”

수빈은 조용히 웃었다.

“나는… 다시 산에 올 거야. 근데 다음엔 더 철저하게 준비해서. 그리고, 오늘 같은 날씨엔 절대 안 올 거고.”

죽음과 마주 선 자리에서 내뱉은 그 작은 다짐들은, 사실 누구나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소망들이었다. 산은 잔인했지만, 동시에 그 소망들을 강제로 끌어올려 주었다.

밤은 길었다. 몇 번이나 눈을 감고 싶었고, 몇 번이나 의식을 잃을 뻔했다. 그럴 때마다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지난날의 사소한 이야기들을 꺼내며 버텼다.

대학 MT에서 마셨던 싸구려 소주 이야기, 첫 출근날 긴장해서 반나절 동안 한 말만 반복했던 이야기, 연애가 끝난 뒤 혼자 울었던 밤 이야기, 아무도 모르게 했던 작은 선행들 이야기.

그 이야기들 사이사이로, 눈발은 여전히 펄펄 내리고 있었다. 하늘도, 땅도, 그들 자신도 어디까지가 무엇인지 구분되지 않을 만큼 하얀 세계 속에 잠겨 갔다.

새벽이 가까워질 즈음, 멀리서 미세한 빛이 어둠을 가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눈이 만든 착시현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빛은 점점 커졌다. 그리고 얼음장 같은 공기를 뚫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계신 분들! 대답해 주세요!”

네 사람은 거의 동시에 몸을 일으키려다 균형을 잃고 다시 눈 위로 쓰러졌다. 그러나 그들은 필사적으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여기요! 여기 네 명 있어요!”

몇 분 뒤, 헤드랜턴에 비친 형광색 구조복이 눈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눈에 익숙한 동작으로 다가온 구조대원들은 네 사람의 상태를 확인하고, 하나씩 따뜻한 담요를 둘러 주었다.

“문자 받았어요. 신호가 약해서 위치가 정확하진 않았는데, 다행히 이 근처로 좁혀져서 찾을 수 있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준호의 눈에서 눈물과 눈물이 뒤섞인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다영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살았네… 우리 진짜, 살았네…”

구조대원들은 일부러 가벼운 농담을 건네며 그들을 안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산을 내려가는 동안, 네 사람의 머릿속에는 오늘 밤 서로에게 했던 말들이 조용히 되감기고 있었다.

“살아 내려가면, 우리는 이제 무엇이든 미루지 않기로 했다.”

며칠 뒤, 도시에 다시 눈이 내렸다. 산에서 내려온 뒤에도 몸살과 근육통이 한동안 그들을 괴롭혔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이전보다 조금 더 단단해져 있었다.

회사로 복귀한 다영은 모니터 속 사표 양식 창을 조용히 닫았다. 대신, 업무용 메신저에 상사에게 보내는 짧은 메시지를 남겼다. “지난번 실수 관련해서, 제가 추가로 준비해 온 개선안이 있습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온 민재는 컴퓨터 앞에 앉아 사진을 정리했다. 눈 속에서 찍힌 사진들, 구조대의 불빛이 어렴풋이 비친 프레임들, 그리고 산 아래로 내려와 찍은 서로의 지친 얼굴 속 안도의 미소.

그는 조용히 새 폴더를 만들고 이름을 붙였다.

2025_눈보라_이후_첫_사진전_준비

수빈은 오래된 지도와 노트를 펼쳐 놓고 겨울 산행 안전 수칙과 실전 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언젠가 자신처럼 산을 찾는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으로만 알았던 것과, 직접 겪어 본 것을 동시에 담아야지.”

그리고 준호는, 며칠 동안 미뤄두었던 시험 접수를 마쳤다. 결제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이 떨렸지만, 그 떨림 뒤에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다.

그날 산에서, 그들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하는 질문보다 그날 이후, 어떻게 살기로 마음먹었는가가 더 중요해졌다는 것을 천천히 깨달아 갔다.

네 사람은 가끔 모여 그날 이야기를 다시 꺼내곤 했다. 어떤 날은 농담처럼 이야기했고, 어떤 날은 잠깐의 침묵을 사이에 둔 채 조용히 회상했다.

“그때 문자 안 갔으면 진짜 어쩔 뻔했냐.” “아니지, 그 전에 우리 더 무리했으면 어쩔 뻔했냐.”

이야기는 매번 조금씩 달랐지만, 마지막 문장은 늘 비슷했다.

“그래도, 다 같이 내려와서 다행이다.” “그래, 우리 다 같이 내려와서 진짜 다행이다.”

2025년의 그 겨울, 눈이 펄펄 내리던 어느 날 산에서 조난당했던 네 청년의 이야기는 거창한 영웅담이 아니라, 서로에게 기대어 버티고, 살아 내려와서, 그다음 삶을 조금이라도 다르게 살아 보기로 한 조용한 약속의 기록이었다.

그들이 나중에 또다시 산을 오르든,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든, 그날 눈 속에서 나눈 말들과 떨리는 숨소리들은 앞으로도 오래도록 그들의 삶 가장 깊은 곳에서 작은 불씨처럼 타오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겨울날, 또다시 눈이 펄펄 내리기 시작하면, 그들은 아마도 창밖을 바라보다가 같은 생각을 떠올릴 것이다.

“우리는 그날, 눈 속에서 길을 잃었지만 어쩌면 그 덕분에 각자의 삶에서 가야 할 길을 조금 더 선명하게 찾게 되었는지도 몰라.”

이 이야기는 2025년 눈 내리던 어느날, 산에서 서로를 붙잡고 버텨 낸 네 청년의 상상 속 기록입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폭설 속으로 떠난 그녀의 야외캠핑

시골 집에 내려온 밤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