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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위로 테무 새벽배송이 온 도시를 흔들던 밤 택배 현장에 있는 한 사람의 눈으로 바라본 새벽배송 논란, 그리고 그 속에서 뒤늦게 깨어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 #테무 #새벽배송논란 #택배기사이야기 #플랫폼전쟁 “알람 안 맞춰도 돼. 테무에서 시키면 새벽에 온다던데?” 어느 겨울 저녁, 서울 변두리의 작은 빌라 거실에서 지연은 농담처럼 말하고 곧바로 스마트폰 화면을 넘겼다. 화면 안에는 형형색색의 상품 썸네일과 믿기 힘든 가격, 그리고 눈에 확 들어오는 한 줄이 있었다. 오늘 23시 59분 이전 주문 시, 내일 새벽 도착. 옆에서 라면을 먹던 남편 민수는 젓가락을 멈추고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몇 년째 플랫폼 개발자로 일하다가 최근 구조조정에 휘말려 계약직으로 전환된 그는, 숫자와 구조에는 빠삭했지만 변화의 속도에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새벽배송? 저 가격에? 저 배송비에? 그의 머릿속에서는 자동으로 물류 네트워크와 인건비, 창고 운영 비용이 떠오르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의외로 단순했다. “와, 진짜 싸다. 근데… 저걸 누가 배송하지?” 그 시각, 도심 외곽의 물류센터에서 준호는 바코드 스캐너를 쥔 채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손등을 타고 흐르는 땀은 차가웠지만, 숨결은 뜨거웠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동네 마트의 배송 기사였다. 점장은 친근했고, 단골 손님들의 안부를 물으며 일하는 맛이 있었다. 하지만 대형 플랫폼과 가격 경쟁에서 밀린 동네 마트는 문을 닫았고, 그는 더 큰 물류회사로 옮겼다가, 다시 최근 들어 외국계 플랫폼과 계약한 배송 대행 업체로 옮겨왔다. “오늘 테무 물량 또 늘었대.” 동료 기사가 툭 던진 말에 준호는 고개를 돌렸다. 파란색, 주황색, 초록색, 그리고 이제는 생소...

첫눈과 김장, 전라도 할머니집에서 보낸 하루

첫눈 내리는 날, 전라도 할머니집 김장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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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과 김장, 전라도 할머니집에서 보낸 하루

서울에 사는 대가족이 첫눈이 내리는 날 전라도 할머니집으로 내려가 김장을 하며 보내는 긴 하루의 이야기. 눈송이와 배추 잎 사이로 오가는 웃음과 추억, 그리고 김치 냄새가 가득한 겨울날의 한 장면.

서울 → 전라도 순창 근교
첫눈 오는 날의 김장
대가족 겨울 여행
배경: 어느 겨울 초입, 첫눈이 내리던 토요일 등장인물: 윤지네 삼형제, 사촌들, 엄마 아빠, 고모 삼촌, 할머니 할아버지

서울에 첫눈이 내린다는 일기예보가 나오던 아침, 종로의 오래된 다세대 주택 꼭대기층에 사는 윤지네 대가족은 눈이 내리기도 전에 이미 겨울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거실 한쪽에는 전라도 할머니 집에 가져갈 짐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막내 사촌까지 합쳐 여덟 명의 아이들이 두꺼운 패딩과 목도리를 꺼내 입으며 바닥을 헤집고 다니고 있었다.

엄마와 고모들은 아침부터 김장 준비 목록을 손에 쥐고 마지막 점검을 했다. 젓갈, 마늘, 생강, 새우젓, 멸치액젓, 고춧가루, 찹쌀가루, 굵은소금, 갓, 쪽파, 배, 사과까지. 서울에서 사 가면 좋은 재료와 전라도에서 할머니가 이미 장만해 두신 것들을 섞어 쓰기로 해서, 전날 밤부터 종이에 빼곡히 적힌 목록들은 하나하나 확인 표시가 되어 있었다. 아빠와 삼촌들은 그 사이에 아이들의 장갑 짝이 맞는지 확인하며, 누구 하나 빼먹지 않고 모자와 목도리를 챙기느라 더 분주했다.

첫눈이 내리는 날에 떠나는 김장 여행은, 이 집안에서 몇 년째 이어지는 비밀스러운 연례행사처럼 느껴졌다. 눈 오는 날의 국도, 김치 냄새 가득한 마당, 그리고 할머니의 “올했냐” 하는 사투리 인사까지 모두가 기다려지는 날이었다.
눈 내리는 겨울 시골 풍경 랜덤 이미지
눈발 사이로 보이는 전라도 시골 마을의 겨울. 실제 풍경과는 조금 다를지 몰라도, 이 날의 공기와 온기를 상상해 볼 수 있는 랜덤 이미지.

차에 오르기 직전, 거실 창밖으로 정말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먼지처럼 희미하게 보였던 것이, 이내 굵은 눈송이로 변해 유리창을 톡톡 두드렸다. 아이들 중 가장 장난끼 많은 준호가 창문에 코를 박고 숨을 훅 불어 하얗게 김을 만들며 말했다.

“와, 진짜 첫눈이야! 오늘 가면 할머니 집 마당도 다 하얗겠지?”

둘째 윤지는 어깨까지 오는 목도리를 둘둘 감으면서 살짝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근데 눈 많이 오면 길 미끄러워서 못 내려가는 거 아냐? 뉴스에서 그랬는데…”

엄마는 아이들 머리를 하나씩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래서 더 일찍 출발하는 거야. 눈 오는 날 국도는 천천히 가면 괜찮아. 게다가 너희 할머니가 우리 기다리느라 벌써 마당 쓸 준비하고 계실걸?”

그렇게 해서, 두 대의 승용차와 한 대의 오래된 카니발 승합차에 온 가족이 나눠 타고 서울을 떠났다. 고속도로 표지판 위에도, 도심의 회색 건물들 위에도, 새로 돋은 눈이 포슬포슬 덮여 갔다. 아이들은 차창에 얼굴을 대고 눈송이의 모양을 세 보려 했고, 어른들은 내비게이션의 예상 도착 시간을 보며 조급함과 설렘을 동시에 느꼈다.

차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김장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김치에 뭐가 더 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제일 먼저였다. 고모는 갓을 듬뿍 넣어야 전라도 김치다운 깊은 맛이 난다고 주장했고, 엄마는 아이들이 잘 먹으려면 너무 알싸하면 안 된다며 배와 사과를 넉넉히 갈아 넣자고 맞섰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아빠가 웃으면서 말을 보탰다.

“결국 할머니 손맛이 다 덮어버릴 텐데 뭐. 우린 그냥 옆에서 열심히 배추만 씻으면 되는 거지.”

그 말에 차 안이 한 번 더 웃음으로 가득 찼고, 눈발은 점점 굵어져 전라도 쪽 하늘로 이어지는 고속도로 위를 조용히 덮어갔다.

몇 시간을 달리자 서울 특유의 회색빛 아파트 숲은 점점 사라지고, 논과 밭이 이어지는 전라도 풍경이 차창 밖으로 펼쳐졌다. 눈이 그쳤다가 다시 흩날리기를 반복하는 사이, 산과 들은 얼룩덜룩한 눈빛을 입었다. 도로 옆 감나무에는 홍시가 몇 개 남아 있었고, 귀촌한 듯한 카페 간판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아이들은 이미 여러 번 “언제 도착해?”를 외친 뒤라, 지금은 졸음과 기대가 뒤섞인 얼굴로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아이들 사이에서 막내 소연이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 나 저기 본 적 있는 것 같아! 저 산이 할머니 집 가는 길에 있던 그 산 아니야?”

고모가 웃으며 대답했다.

“매년 겨울마다 보는데 이제야 익숙해진 거야? 맞아, 저 산만 지나면 금방이야. 조금만 더 참아.”

드디어 좁은 시골길로 접어들고, 비포장 구간을 덜컹거리며 지날 때쯤, 아이들은 아예 창문에 얼굴을 붙이고 마을 입구의 표지석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 뒤, 오래된 마을 이름이 새겨진 돌기둥과 함께 빨간 지붕을 한 작은 정자, 그리고 그 뒤편으로 낮은 기와집들이 나타났다.

할머니 집은 마을에서도 조금 더 안쪽에 있었다. 마당 앞에는 감나무와 대추나무가 나란히 서 있었고, 오래된 장독대가 집을 감싸듯 둘러서 있었다. 눈은 아직 이 마을에는 많이 쌓이지 않았지만, 지붕 위와 장독대 뚜껑 위에 살짝 내려앉아 겨울이 왔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차가 마당 앞에 서자마자, 대문이 쾅 열리며 할머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털모자를 푹 눌러쓴 할머니는 두 팔을 크게 벌리고 소리쳤다.

“어이쿠, 우리 식구들 다 왔냐! 운전하느라 고생했네, 어서 내려온나!”

아이들은 제일 먼저 차에서 뛰어 내려 마당으로 달려갔다. 서울의 좁은 거실과는 비교도 안 되게 넓은 마당이, 그들에게는 작은 놀이터였다. 땅은 차갑게 얼어 있었지만, 오래되어 군데군데 기울어진 장독들과 닭장, 그리고 우물 터는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할머니는 한 명씩 아이들을 끌어안고 이름을 부르며, 키가 얼마만큼 컸는지 재보느라 분주했다. 할아버지는 마당 한쪽에서 장작을 패다 말고, 모자를 벗어 들고 어색한 듯 미소를 지었다. 서울에서 자주 보는 얼굴이지만, 이렇게 온 식구가 한 번에 내려오는 날은 늘 특별했다.

할머니 집 마당에는 이미 커다란 파란 고무대야와 허리까지 오는 플라스틱 통들이 줄지어 나와 있었다. 그 주변에는 소금에 절여진 배추가 층층이 쌓여 있었고, 마늘과 생강을 빻은 냄새, 대파와 쪽파의 향이 찬 공기를 가르며 코끝을 찌르고 있었다.

“올해는 좀 많이 했어. 너희도 많고, 옆집에도 조금 나눠 주려고. 얼른 점심 먹고 시작하자.”

할머니의 말에 엄마와 고모들은 서로 눈을 마주보며 웃었다. 사실 서울에서 내려오는 길에 “올해는 좀 적게 하자”라는 말을 여러 번 나눴지만, 막상 할머니가 이렇게 준비해 놓으신 것을 보니 다른 선택지는 없어 보였다. 오늘 하루는 온전히 김장에 바쳐질 운명이었다.

점심은 단출하지만 이상하게도 도시에서는 맛볼 수 없는 맛이었다. 갓 지은 하얀 쌀밥 위에 남은 김치를 볶아 올린 김치볶음, 직접 담근 간장으로 조린 계란장조림, 말린 무를 넣은 시래기국. 아이들은 배가 고팠던 것도 있지만, 여기서만 느껴지는 구수한 맛 덕분에 밥그릇을 몇 번이나 비워냈다.

점심을 먹고 난 뒤, 드디어 본격적인 김장이 시작되었다. 할머니가 앞치마를 툭툭 털어 매며 모두를 마당으로 불러냈다.

“자, 남자라고 피하지 말고 다 나온나. 오늘은 다 같이 하는 기다.”

아빠와 삼촌들은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매년 겪어온 일이라 순순히 고무장갑을 끼고 마당으로 나왔다. 아이들은 자기들도 해야 한다며 작은 고무장갑을 나눠 끼고 줄을 섰다. 할머니는 아이들을 보며 웃다가도, 곧 진지한 얼굴로 배추를 한 포기 들어 올리며 말했다.

“자, 잘 보이제? 김장 하는 날은 장난 날이 아니여. 근디 또 너무 심각하면 재미없응께, 중간중간 몰래 배추 속도 집어 먹고 그래도 혀도 된다. 허허.”

모두가 한 번 더 웃었고, 그 웃음이 조금 잦아들자 본격적인 손놀림이 시작되었다.

배추 씻기 담당
아이들과 아빠, 삼촌은 수도가에 줄지어 서서 배추를 깨끗이 헹구고 물기를 털었다. 물이 튀어 옷이 젖었지만, 그마저도 놀이처럼 느껴져 서로에게 물을 튀기며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양념 버무리기 담당
엄마와 고모, 할머니는 고춧가루와 찹쌀풀, 새우젓, 멸치액젓, 마늘과 생강을 넓은 대야에 넣고 손으로 꼼꼼히 섞어가며 양념을 만들었다. 손등이 시려울 틈도 없이, 손놀림은 숙련된 리듬을 탔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배추를 제대로 잡지도 못해 양념을 여기저기 흘렸다. 막내 소연이는 양념에 손을 너무 깊게 넣었다가 손목까지 빨갛게 물들어, 마치 장난감 로봇 팔을 낀 것처럼 휘저으며 좋아했다.

“소연아, 너무 세게 문지르지 마. 배추 잎이 다 찢어져.”

윤지가 동생 손을 붙잡고 조심히 배추 잎 사이를 벌려 양념을 넣어주는 법을 보여주자, 소연이는 눈을 반짝이며 따라 했다. 잎 사이사이에 양념이 고르게 퍼질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까지 알차게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한편 준호는 슬쩍슬쩍 양념 묻은 배추를 한 입씩 베어 먹고 있었다. 적당히 절여진 배추에 짭짤하고 매콤한 양념이 어우러져, 아직 숙성되지 않았지만 충분히 맛있었다.

“야, 너무 많이 먹지 마. 나중에 속 아파.”

사촌 누나가 타박했지만, 준호는 입가에 묻은 양념을 훔치며 말했다.

“김장은 오늘만 하잖아. 오늘 안 먹으면 언제 먹어.”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할머니가 허허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맞다. 김장 날에 배추 속 안 집어먹는 사람은 사람도 아니여. 근디 너무 많이 먹다가 저녁에 죽 쑤워달라고만 하지 마라잉.”

그렇게 농담이 오가는 사이, 마당에는 점점 양념이 잘 배어든 배추들이 한 줄씩 쌓여 갔다. 빨간 기운이 서서히 마당의 공기를 채워 나갔고, 손끝은 얼어 왔지만 마음은 점점 뜨거워졌다.

김장을 하다 보면, 이상하게도 오래된 이야기들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양념을 발라 배추를 차곡차곡 쌓으며 할머니는 젊었을 적 겨울 이야기를 꺼냈다. 아직 도로도 제대로 닦이지 않았던 시절, 눈이 허리까지 쌓인 마을에서 김장을 하느라, 장독대까지 길을 내며 배추를 날랐다는 이야기였다.

“그때는 냉장고도 변변찮고, 김치가 겨울 내내 식구들 목숨줄 같은 거여. 어쩌다 김장에 실수라도 하면, 그 해 겨울엔 다들 쭈글쭈글해지는 기분이었지.”

할머니의 말에 엄마가 조용히 웃으며 양념을 더했다.

“그래도 지금도 별 다를 건 없어요. 김장 실패하면 겨울 내내 김치가 맛이 없잖아요. 맨날 반찬 투정만 늘어나고.”

고모가 장난스럽게 한마디를 보탰다.

“맞아요, 그래서 오늘도 모두 진지하게 하는 겁니다. 특히 우리 어머니, 눈빛이 장난 아니신데?”

아이들은 그 대화를 들으면서도, 그저 배추 잎에 양념을 바르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어렴풋이 느꼈다. 이 날 만들어지는 김치가 겨울 내내 밥상 위에 오르는, “집 냄새” 같은 것이라는 걸.

눈발이 다시 굵어지며, 하늘은 어느새 해가 기울어가는 빛을 띠고 있었다. 김장을 끝내기 전까지 날이 완전히 저물지 않도록 서둘러야 했다. 장독대 옆, 빈 항아리들은 첫눈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처럼 고요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잠시 쉬는 시간, 할머니가 큰 주전자에 끓여온 생강차를 나눠 주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자, 손끝의 얼음기운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와, 이거 진짜 맛있다. 매운데 달아.”

윤지가 한 모금 마시고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생강의 알싸함과 꿀의 달콤함, 대추 향이 어우러진 따뜻한 차가 몸 안쪽까지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아이들은 생강이 너무 매워서 조금씩만 마셨지만, 어른들은 연신 컵을 비우며 추위를 견딜 힘을 얻었다.

잠깐의 휴식을 끝내고 다시 시작한 김장은 조금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이제 모두 손에 감을 잡았는지, 배추가 대야에서 장독대 앞으로 이동하는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할머니는 항아리 안쪽을 깨끗이 닦고, 바닥에 김치를 차곡차곡 눌러 담았다.

“자, 이건 서울 집으로 가져갈 거. 이건 옆집이랑 작은아버지네 줄 거. 그리고 이건 우리 집 겨울용.”

항아리마다 붙여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름표 같은 구분. 아무리 많은 김치를 담가도, 나눌 사람들을 떠올리다 보면 늘 조금 모자란 기분이지만, 그 모자람이 오히려 사람들 사이의 정을 더 진하게 해 주는 것 같았다.

김장의 마지막 단계는 언제나 아이들의 몫이었다. 잘 버무린 양념을 따로 덜어, 씻지 않은 배추 잎과 김, 김가루를 섞어 만든 “그날만 먹는 김치 쌈”이 준비되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넓은 상을 마당 한쪽에 펴고, 따끈한 밥과 삶은 돼지고기 몇 점을 올렸다.

“자, 이게 김장 날의 진짜 하이라이트다. 오늘 만든 양념으로 오늘만 먹어보는 거여.”

아이들은 배추 잎을 한 장씩 집어, 그 위에 막 지은 밥을 올리고, 돼지고기 한 점, 그리고 막 버무린 김치를 올려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눈이 절로 동그래지는 맛이었다. 젓갈과 마늘, 생강, 배와 사과, 그리고 고춧가루의 향이 한 번에 터져 나와, 입안 가득 겨울의 시작을 알려 주는 듯했다.

“와, 이거 식당에서 파는 거보다 훨씬 맛있어.”

준호가 감탄하자, 할머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라믄. 이 맛 보려고 다들 김장하는 거여. 겨울 내내 먹는 것도 좋지만, 나는 이렇게 만들어 놓고 첫날에 먹는 이 맛이 제일 좋아.”

눈은 어느새 다시 내리기 시작해, 마당과 장독대 위를 조용히 덮었다. 모두가 배추 쌈을 입에 한가득 넣은 채 눈을 올려다보자, 하늘에서는 크고 작은 눈송이들이 마치 축복처럼 쏟아져 내렸다.

해가 서서히 산 뒤로 넘어가고, 마당은 푸른빛과 주황빛이 섞인 겨울 저녁 특유의 색으로 물들어 갔다. 김장을 거의 마무리한 어른들은 장독대 뚜껑을 하나하나 덮으며 마지막 점검을 했다. 항아리마다 손바닥으로 조용히 한 번씩 두드리는 할머니의 손짓은, 마치 오래된 의식을 치르는 것 같았다.

“자, 이제 이 친구들은 여기서 겨울을 나는 거여. 눈도 맞고, 바람도 좀 맞고, 그러다 보면 속이 쫙 익어서 너희 밥상에 올라가겠지.”

할머니의 말에 아이들은 항아리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금은 그냥 조용한 도자기 항아리일 뿐이지만, 몇 주 후, 몇 달 후에는 그 안에서 새콤하고 깊은 김치가 나올 거라는 사실이 어딘가 믿기지 않는 듯했다.

김장을 다 끝낸 뒤, 아이들은 잠깐 마당에서 눈놀이를 했다. 아직 눈이 많이 쌓이진 않았지만, 얼어붙은 흙 위에 얇게 덮인 눈을 긁어 모아 작은 눈사람을 만들었다. 눈사람의 눈은 검은 자갈, 코는 마당 구석에서 주워온 작은 당근, 목에는 낡은 손수건을 둘러 주었다.

“이 눈사람, 내일까지 안 녹을까?”

윤지가 눈사람 옆에 쭈그려 앉아 묻자, 준호가 손으로 눈사람 머리를 살짝 다독이며 말했다.

“내일 아침에도 보자. 우리 서울 올라가기 전에 사진도 찍고.”

고요한 겨울 저녁,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눈 쌓인 마당을 가로질렀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이따금 지나가는 트럭 소리가 산허리에 부딪혀 메아리쳤다. 도시의 소음과는 다른, 느리고 넉넉한 리듬이었다.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자, 집 안에서는 다시 바쁜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김장 후에는 언제나 단출하지만 특별한 저녁이 준비되었다. 김장 김치와 수육, 그리고 김치 국물로 끓인 김치찌개, 마지막으로 따뜻한 누룽지까지. 하루 종일 서서 일한 어른들은 의자에 앉기 무섭게 젓가락을 들었다.

“와, 이거 아까 먹었던 양념이랑 또 다르다.”

고모가 김치찌개를 한 숟갈 떠먹고 감탄하자, 엄마가 웃으며 말했다.

“김장 김치 국물로 끓여서 그런가 봐요. 오늘은 뭘 해도 다 맛있는 날이네요.”

아이들은 수육을 김치에 돌돌 말아 먹으며, 아까 마당에서 있었던 일을 서로 자랑하듯 떠들어댔다. 누가 제일 많이 배추를 버무렸는지, 누가 물을 제일 많이 튀겼는지, 누가 눈사람 눈을 예쁘게 만들었는지. 그 모든 자랑은 결국 할머니의 한마디로 정리되곤 했다.

“다 잘했어, 다 잘했어. 오늘은 누구 덕분이다 말 안 해도, 이렇게 다 같이 모인 것만으로도 벌써 반은 성공이여.”

저녁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끝낸 뒤, 거실에는 온 가족이 둘러앉을 수 있는 이불이 깔렸다. 할머니 집의 거실은 넓지 않았지만, 바닥에 이불을 여러 겹 깔고 앉으면 이상하게도 모두 들어갈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할머니는 오래된 전기장판을 켜고, 아이들에게 얇은 담요를 하나씩 건네주며 말했다.

“바깥에는 첫눈이 오고, 안에는 김치 냄새랑 사람 냄새가 가득하니, 오늘은 진짜 겨울이 온 날이라고 해야겠구나.”

거실 한가운데, 작은 탁자 위에는 귤 한 상자와 할머니가 직접 삶은 고구마가 놓였다. 아이들은 김장을 마치고 난 뒤라 그런지, 배가 부르다고 말하면서도 귤 껍질을 쉴 새 없이 까 먹었다. 귤 껍질이 탁자 위에 작은 산처럼 쌓여 갔고, 고구마에서 피어오르는 김은 겨울밤 특유의 포근한 냄새를 방 안에 퍼뜨렸다.

“서울에서는 잘 안 보이는데, 할머니 집에서는 별이 되게 많이 보여요.”

윤지가 창문 너머를 바라보며 말하자, 할아버지가 웃었다.

“서울은 불빛이 너무 많아서 그렇지. 여기서는 가로등도 적고, 집도 적으니 별이 더 잘 보이는 거야. 근디 또, 사람 사는 건 거기나 여기나 다 똑같지.”

텔레비전에서는 겨울 특집 드라마가 흘러나왔지만, 누구도 화면에 깊이 빠져들지 않았다. 대신 서로의 이야기가 더 흥미로웠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 회사에서 겪는 웃기고도 이상한 일들, 작년에 김장을 하다가 생긴 소소한 실수까지.

할머니는 조용히 귤을 까다가, 문득 아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나중에 너희가 다 커서 각자 바빠져도, 겨울에 한 번씩은 이렇게 모이면 좋겠다. 꼭 김장을 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첫눈 오는 날에 한 번씩 얼굴 보러 오는 거지.”

그 말에 방 안의 시간이 잠시 느려진 것 같았다. 어른들은 서로 눈을 마주보며 대답 대신 미소를 나눴고, 아이들은 아직 그 말의 무게를 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왠지 모르게 그것이 중요한 약속처럼 느껴졌다.

손에 밴 김치 냄새, 귤 껍질의 상큼한 향, 고구마의 달큰함, 전기장판의 따뜻함. 모든 감각이 겹쳐져, 이날의 밤은 누구에게도 쉽게 잊히지 않을 기억으로 천천히 스며들고 있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눈은 더 조용히, 더 촘촘히 내렸다. 할머니 집의 지붕과 마당, 장독대와 눈사람 위로 하얀 이불이 조금씩 덮였다. 집 안에서는 하나둘 불이 꺼지고, 마지막으로 거실의 작은 스탠드만이 노란빛을 남기고 있었다.

아이들은 이불 속에서 서로의 발을 밀쳐가며 자리를 정리하다가, 결국 뒤죽박죽 얽힌 상태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바람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뒤척이는 이불 소리가 희미하게 났다.

“윤지야, 내일 아침에 제일 먼저 일어나서 눈사람 보러 가자.”

소연이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윤지는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응. 근데 눈 더 많이 오면 눈사람이 눈에 파묻혀 있을지도 몰라.”

준호가 옆에서 킥킥 웃으며 한마디를 더했다.

“그러면 눈사람 발굴 작전 해야지. 눈 속에서 눈사람 꺼내기. 완전 재밌겠다.”

그 말을 끝으로, 아이들은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하루 종일 김장하느라 쌓인 피곤함과, 눈 오는 시골 마을의 고요함이 함께 내려앉으며, 할머니 집은 깊은 겨울밤 속으로 잠겨갔다.

그리고 거실 한쪽, 창문 가까이에 놓인 작은 탁자 위에는, 내일 서울로 올라갈 때 함께 실려 갈 김치통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아직 완전히 익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새콤한 기운이 살짝 배어 나오기 시작하는 듯했다.

다음 날 아침, 가장 먼저 일어난 것은 소연이었다. 아직 해가 완전히 뜨기 전, 방 안은 희끄무레한 빛으로 가득했다. 소연은 조심스레 이불을 빠져나와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밖을 보는 순간, 작은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마당은 하얗게 변해 있었다. 밤새 내린 눈이 마당과 장독대, 눈사람과 감나무를 모두 덮어 버렸던 것이다. 마음이 급해진 소연은 이불을 걷어 올리며 윤지를 흔들었다.

“언니! 언니! 눈 완전 많이 왔어! 눈사람도 아직 있어!”

윤지는 잠결에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창문을 향해 다가가자, 눈부신 하얀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밤사이 소복이 쌓인 눈 위로, 어제 만들었던 눈사람이 조금 더 통통해진 모습으로 서 있었다.

“우와… 진짜 눈사람이 겨울 나라에 온 것 같아.”

아이들은 두꺼운 옷을 다시 껴입고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차가운 공기가 폐 속까지 깊이 들어왔지만, 그조차 상쾌하게 느껴졌다. 눈 위에 남은 발자국은 어제 저녁까지의 흔적이었고, 그 위에 하룻밤 사이에 쌓인 눈이 새하얀 레이어를 더해 주고 있었다.

눈사람은 조금 기울어져 있었지만,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이들은 눈사람 주변의 눈을 다시 모아 발밑을 단단히 다져 주고, 머리 위에 작은 눈 모자를 하나 더 올려 주었다.

“이제 완전 겨울 왕국 눈사람이야.”

소연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하는 사이, 할머니가 대문 앞에서 아이들을 불렀다.

“아침 먹어야지. 춥다고 너무 오래 밖에 있지 말고. 사진도 이따 같이 찍자.”

아침 식탁 위에는 전날 담근 김치가 한 접시 올라와 있었다. 아직 완전히 익지는 않았지만, 하얀 속잎 사이로 퍼진 빨간 양념이 훨씬 더馥郁한 향을 내고 있었다. 따끈한 콩나물국과 달걀프라이, 그리고 김 한 봉지가 함께 놓였다.

“이게 어제 우리가 만든 김치야?”

준호가 젓가락으로 김치를 집어 들며 묻자,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지. 아직 덜 익어서 아삭아삭 혀. 이런 맛도 또 별미여.”

한 입 베어 문 김치 속에서, 어제 하루 동안의 기억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차가운 물에 배추를 헹구던 손의 감촉, 양념을 버무리던 순간의 냄새, 장독대 앞에서 웃음이 터졌던 순간들. 양념의 매콤함 뒤로, 그런 장면들이 길게 이어졌다.

아침을 먹고 난 뒤, 서울로 돌아갈 시간까지는 아직 조금 여유가 있었다. 할머니는 집 안에서 가져갈 김치통을 하나씩 꺼내, 뚜껑을 단단히 잠그며 말했다.

“이건 상온에 조금 두었다가, 냉장고로 옮겨. 너무 빨리 넣으면 잘 안 익는다. 그리고 이건 나중에 찌개 끓일 때 쓰고, 이건 그냥 반찬으로 먹고.”

엄마와 고모는 고개를 끄덕이며, 각각의 김치통을 차에 실을 순서를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아이들은 그 사이에 마지막으로 마당을 뛰어다니며 눈을 한 번 더 밟았다.

“내년에도 또 올 거지?”

소연의 질문에 윤지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당연하지. 내년에는 우리가 더 잘하게 돼서, 할머니 김장 훨씬 빨리 끝낼 거야.”

“그럼 그때는 눈사람 두 개 만들자. 아니, 세 개!”

아이들은 이미 내년 겨울을 상상하며 웃었다.

서울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자, 할머니 집 앞 마당에는 다시 짐들이 줄지어 나왔다. 김치통과 보따리들, 아이들의 작은 배낭까지 차곡차곡 차에 실렸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아직 눈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조금은 기울고, 눈도 약간 녹았지만, 어제와 오늘의 추억을 모두 품고 있는 얼굴이었다.

출발하기 전에, 온 가족이 눈사람 옆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눈 덮인 장독대와 기와지붕이 배경이 되고, 각자의 코끝과 볼은 차가운 공기에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몇 번이나 이어졌고, 매번 다른 표정과 자세가 사진 속에 담겼다.

“자, 마지막으로 하나 더. 이번에는 다들 크게 웃어봐.”

아빠의 말에, 모두가 일부러 더 크게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오늘로 끝나지 않을, 앞으로도 계속될 겨울날의 약속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차에 올라타는 순간, 할머니는 대문 옆에 서서 한 번 더 손을 흔들었다. 눈발 사이로 보이는 할머니의 모습은 작아 보이면서도, 이상하게 크게 느껴졌다.

“조심혀이 가고! 눈 온다고 너무 빨리 달리지 말고! 서울 가서도 김치 맛없다고 투정하지 말고!”

차가 마을을 벗어나기 시작하자, 아이들은 뒷창문에 얼굴을 대고 마지막까지 할머니 집을 바라보았다. 눈사람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다가, 결국 하얀 눈과 산 사이에 묻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눈을 감으면 언제든지 그 모습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얀 눈 속에서 서 있던 눈사람, 장독대, 감나무, 그리고 그 앞에서 빨간 장갑을 끼고 서 있던 할머니의 손까지.

다시 서울로 향하는 고속도로 위, 차 안에는 피곤함과 아쉬움, 그리고 묘한 포만감이 섞인 공기가 흘렀다. 아이들은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다가 하나둘씩 졸기 시작했고, 어른들은 이번 겨울 동안 김치를 어떻게 나눠 먹을지, 어느 정도 지나면 맛이 절정에 이를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올해 김치는 좀 더 달큰한 것 같지 않아요?”

엄마가 말하자, 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들 때문에 배랑 사과를 더 많이 넣어서 그럴 거야. 그래도 그게 또 올해만의 맛이지.”

고모는 창밖으로 스치는 눈 쌓인 들판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내년에도 다 같이 내려올 수 있을까. 그래도 오늘 같은 날이 또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 말에 차 안은 잠시 조용해졌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아빠가, 백미러 너머로 뒤를 한 번 훑어보고 말했다.

“우리가 잊지 않으면, 분명 또 올 수 있을 거야. 할머니도, 이 마을도, 저 눈사람도 우리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어느새 눈발은 조금 잦아들었고, 도로 위에는 치워진 눈과 녹은 물이 번들거렸다. 하지만 하늘은 여전히 겨울의 색을 품고 있었다. 회색빛과 푸른빛 사이, 어딘가에서 다시 눈이 시작될 것처럼.

윤지는 반쯤 감긴 눈으로 창밖을 보다가, 곧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오늘 하루를 천천히 되짚어 보았다. 첫눈이 내리던 서울의 아침, 길 위에서 보았던 산과 들, 할머니 집 마당, 김장 양념의 냄새, 눈사람과 장독대, 그리고 할머니의 웃음소리까지.

그리고 문득, 마음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

“나중에 내가 어른이 돼도, 겨울에 한 번씩은 꼭 전라도에 내려가야지. 첫눈이 올 때, 김치 냄새 나는 마당으로 돌아가야지.”

그런 생각을 품은 채, 윤지는 조용히 잠에 빠져들었다. 차 안에는 고른 숨소리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겨울 노래가 잔향처럼 섞여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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