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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위로 테무 새벽배송이 온 도시를 흔들던 밤 택배 현장에 있는 한 사람의 눈으로 바라본 새벽배송 논란, 그리고 그 속에서 뒤늦게 깨어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 #테무 #새벽배송논란 #택배기사이야기 #플랫폼전쟁 “알람 안 맞춰도 돼. 테무에서 시키면 새벽에 온다던데?” 어느 겨울 저녁, 서울 변두리의 작은 빌라 거실에서 지연은 농담처럼 말하고 곧바로 스마트폰 화면을 넘겼다. 화면 안에는 형형색색의 상품 썸네일과 믿기 힘든 가격, 그리고 눈에 확 들어오는 한 줄이 있었다. 오늘 23시 59분 이전 주문 시, 내일 새벽 도착. 옆에서 라면을 먹던 남편 민수는 젓가락을 멈추고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몇 년째 플랫폼 개발자로 일하다가 최근 구조조정에 휘말려 계약직으로 전환된 그는, 숫자와 구조에는 빠삭했지만 변화의 속도에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새벽배송? 저 가격에? 저 배송비에? 그의 머릿속에서는 자동으로 물류 네트워크와 인건비, 창고 운영 비용이 떠오르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의외로 단순했다. “와, 진짜 싸다. 근데… 저걸 누가 배송하지?” 그 시각, 도심 외곽의 물류센터에서 준호는 바코드 스캐너를 쥔 채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손등을 타고 흐르는 땀은 차가웠지만, 숨결은 뜨거웠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동네 마트의 배송 기사였다. 점장은 친근했고, 단골 손님들의 안부를 물으며 일하는 맛이 있었다. 하지만 대형 플랫폼과 가격 경쟁에서 밀린 동네 마트는 문을 닫았고, 그는 더 큰 물류회사로 옮겼다가, 다시 최근 들어 외국계 플랫폼과 계약한 배송 대행 업체로 옮겨왔다. “오늘 테무 물량 또 늘었대.” 동료 기사가 툭 던진 말에 준호는 고개를 돌렸다. 파란색, 주황색, 초록색, 그리고 이제는 생소...

폭설이 만든 하루, 아파트 단지에서 완성된 가족의 겨울 추억

폭설이 만든 하루, 아파트 단지에서 완성된 가족의 겨울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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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이 만든 하루, 아파트 단지에서 완성된 가족의 겨울 추억

광주에도 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아파트 단지는 거대한 눈 놀이터가 되었다. 아빠와 딸들이 함께 눈싸움도 하고, 경사로에 눈썰매장을 만들고, 밤이 될 때까지 눈사람을 쌓아 올린 하루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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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겨울 들어 처음으로, 기상 예보에서 광주에 대설 특보가 내려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그다지 실감을 못 했다. 아침부터 조금씩 내려앉던 눈송이는 점심이 되면서 점점 굵어졌고, 오후가 되어서는 눈이 아니라 흰색 비가 쏟아지는 것처럼 하늘과 대지가 하나로 번져 보였다. 아파트 베란다 유리창을 따라 흘러내리던 물방울은 어느새 사라지고, 난간 위에는 조심스레 쌓이기 시작한 눈이 두툼한 솜이불처럼 부풀어 올랐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첫째 딸이 창가에 매달려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아빠! 진짜 눈이야, 눈! 광주에도 이렇게 많이 오네! 운동장도 하얗고, 놀이터도 하얗고, 차들도 다 사라졌어!”

둘째 딸은 아직 글씨도 서툴지만 언니가 소리치는 대로 따라 외쳤다.

“눈, 눈! 아빠, 눈사람 만들자!”

그 말에 아빠는 한숨 섞인 웃음을 지으면서도, 마음 한켠에서 아이처럼 들뜬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사무실 창밖으로 눈을 바라보던 예전의 겨울과는 다른, ‘같이 놀자’고 조르는 시선이 이 집 안에는 가득했다.

광주 아파트 단지에서 아빠와 딸이 함께 눈싸움을 즐기는 겨울 풍경 랜덤 이미지
폭설이 내린 날, 눈으로 가득 찬 광주 아파트 단지의 겨울 놀이터 풍경.

오후 세 시가 조금 넘자 아빠는 결국 노트북을 덮어 버렸다. 재택근무라 회의 몇 개를 마치고 나니 남은 일은 정리하면 되는 수준이었고, 굳이 오늘 안에 끝내지 않아도 되는 보고서 한 장을 내일로 미루는 것은 그리 큰 죄도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눈이 그칠 기미가 없다는 것이 마음을 더욱 흔들어 놓았다.

“지금 나가지 않으면, 이 눈은 내일이면 다 더러워지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지금 이 순간 아이들과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묵직한 책임감이 가슴속에 눌러 앉았다.

“얘들아, 옷부터 갈아입자!”

아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첫째는 번개처럼 자기 방으로 뛰어 들어가 패딩을 꺼냈고, 둘째는 여전히 뒤뚱거리면서도 옷장을 열고 분홍색 패딩을 끌어냈다. 잠시 후 거실에는 털모자, 장갑, 목도리, 방수부츠들이 산처럼 쌓였다. 엄마는 소파에 앉아 웃음을 터뜨렸다.

“다녀와. 사진 많이 찍어 와. 나중에 블로그에 올려줄게.”

아빠는 장갑을 끼면서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럼 오늘은 콘텐츠 찍는 날이다. 광주 아파트 단지 눈놀이 특집!”

현관문을 열자마자 차가운 공기가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다. 복도형 아파트가 아니라 계단식 구조라, 문을 나서면 바로 난간 너머로 하얀 세상이 펼쳐졌다. 계단 손잡이 위에도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고, 1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아이들은 벌써부터 손으로 눈을 긁어모아 서로에게 뿌리며 웃어댔다.

“야, 아직 밖에 나간 것도 아니야. 그냥 내려가자, 얼른.”

아빠의 말은 어느새 설레는 웃음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1층 현관문을 밀고 나가자, 아파트 단지는 완전히 다른 공간이 되어 있었다. 보도블록과 주차선, 흙과 잔디의 경계는 이미 사라졌고, 평범한 회색의 도시 풍경을 덮어버린 흰 눈은 공간의 높낮이마저 새로운 모양으로 바꾸어 놓았다. 주차된 차들은 하나같이 거대한 눈 언덕처럼 보였고, 놀이터 주변의 철제 난간은 흰색 레이스로 장식된 것처럼 섬세하게 빛났다.

복도 쪽에서 다른 집 아이들도 하나 둘씩 내려오기 시작했다.

“어, 수진이네도 나왔네?”

평소 인사만 가볍게 나누던 옆동 아빠가 두 아이와 함께 서 있었다. 눈밭 한가운데에서 서로의 시선을 마주치자, 어색한 인사 대신 같은 말을 뱉어냈다.

“눈, 진짜 많이 왔네요.”

그 순간, 왠지 모르게 서로의 어린 시절 눈놀이 기억까지 공유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이들은 이미 어른들보다 앞서 있었다. 놀이터 모래바닥은 완전히 눈으로 덮여 있었고, 미끄럼틀 아래는 아이들이 굴려 모아둔 눈덩이와 발자국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첫째는 곧장 흰 눈 위로 몸을 던지며 소리쳤다.

“아빠, 나 천사 모양 만들 거야!”

두 팔을 쭉 벌리고 눈 위에 누운 뒤, 팔을 좌우로 쓸어내리고 다리를 위아래로 흔들자 눈 위에 날개와 치마를 단 눈천사의 실루엣이 남았다.

둘째는 아직 눈이 낯설었는지 살짝 주저하다가, 언니가 웃으며 손짓하자 조심스레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뎠다. 부츠가 눈을 밟을 때마다 “바삭, 사각” 하는 소리가 났고, 그 소리에 놀라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아빠, 눈이 소리 나! 또 나!”

아빠는 마음속 어딘가에 조용히 묻어두었던 감각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자신도 어린 시절 처음 밟았던 눈의 감촉과 소리가 몸속 깊은 곳에서 울리듯이 다시 떠올랐다.

단지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만든 눈천사와 눈사람이 함께 있는 겨울 풍경 랜덤 이미지
놀이터는 어느새 아이들이 만든 눈천사와 눈사람들로 가득 채워졌다.

한참을 눈을 밟으며 돌아다니던 아이들은 결국 기다렸다는 듯 외쳤다.

“아빠, 우리 눈싸움 하자!”

첫째는 이미 아빠의 무릎 높이까지 올라오는 눈을 두 손으로 모으기 시작했고, 둘째는 언니를 흉내 내며 작은 눈덩이를 만들었다. 아빠는 일부러 천천히, 그리고 크게 눈을 모아 도토리만 한 눈덩이부터 수박만 한 눈덩이까지 보여주며, 눈을 어떻게 뭉치면 잘 뭉쳐지는지 설명했다.

“눈은 너무 꽉 누르면 얼음처럼 단단해져서 맞으면 아파. 손으로 감싸듯이 살살 굴려야 돼.”

첫째는 아빠의 말을 따라 동그랗게 돌리다가, 어느 순간 아빠 쪽을 향해 재빠르게 던졌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아빠의 어깨에 눈이 터졌고, 흰 가루가 패딩 위로 퍼져나갔다.

“야, 기습 공격이야?”

아빠가 장난스럽게 소리치자 둘째도 용기를 얻은 듯 작고 부서지기 쉬운 눈덩이를 던졌다. 그 눈덩이는 허공에서 흩어졌지만, 그것만으로도 둘째의 얼굴은 승리감에 물들었다.

아파트 단지 전체가 전쟁터가 되었다. 서로 편을 나누거나 규칙을 정한 것도 아니었지만, 어느새 아이들은 아빠들을 향해 전면 공격을 시작했고, 아빠들은 일부러 조금씩 맞아주며 과장된 비명소리를 냈다.

“아이고, 맞았다! 나 쓰러진다!”

뒤로 벌러덩 넘어지는 아빠를 보고 아이들은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흰 눈이 튀고, 웃음소리가 튀고, 붉은 볼 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한창 눈싸움이 무르익어 갈 즈음, 다른 동에서 내려온 또 다른 아빠와 딸이 놀이터 쪽으로 걸어왔다. 그들은 두 손으로 큰 검은 봉투를 들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비닐봉지를 겹겹이 겹쳐 만든 간이 눈썰매였다.

“여기 경사로가 딱 좋겠네. 혹시 같이 타실래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제안이 오갔다. 아파트 단지의 경사 있는 진입로는 그날만큼은 차가 다니지 않았고, 빙판이 되기 전의 부드러운 눈길은 아이들을 위한 눈썰매장으로 변신했다.

아빠는 우선 경사로의 길을 여러 번 걸어 올라갔다가 미끄러져 내려오며 상태를 살펴보았다. 눈의 깊이와 단단함, 밑에 숨어 있을지 모르는 돌이나 요철도 손으로 쓸어 확인했다.

“여기면 괜찮겠다.”

그렇게 판단하자, 봉투형 눈썰매에 아이를 태우고 첫 시범 운행을 했다. 첫째가 조심스레 썰매 위에 앉고, 아빠는 뒤에서 손을 놓으면서 말했다.

“준비됐지? 하나, 둘, 셋!”

눈썰매는 처음에는 더디게 움직이다가, 중간 지점을 지나면서 속도를 붙였다. 첫째의 입에서는 순간적인 비명과 함께 신이 난 웃음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꺄아아아! 더 빨리!”

경사로 아래에 서서 지켜보던 둘째는 언니가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 양손을 흔들며 환호했다. 보도블록에 빠르게 그어진 눈썰매 자국이 반복될수록,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아파트 단지 경사로에서 아빠가 딸을 태우고 눈썰매를 밀어주는 모습 랜덤 이미지
경사로는 어느새 아이들을 위한 작은 눈썰매장으로 변했다.

곧이어 둘째도 썰매에 올라탔다. 아직 키가 작아 몸이 휘청거릴 것 같아 아빠는 이번에는 썰매에 함께 앉기로 했다. 아빠가 뒤에서 둘째의 허리를 감싸 안고, 앞쪽을 꽉 잡은 상태에서 천천히 밀어 내려갔다. 눈이 옷 안으로 파고들 만큼 차가웠지만, 둘째의 웃음소리가 귀 옆에서 쨍하게 울려 퍼지는 순간, 그 차가움은 기분 좋은 전율로 변했다.

경사로 양 옆에는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의 발걸음이 모여 작은 응원석이 생겨났다. 엄마들 몇 명은 멀리서 휴대폰 카메라를 들고 아이들의 모습을 촬영하고 있었고, 어떤 할머니는 손주가 내려올 때마다 이름을 부르며 박수를 쳤다. 평소에는 각자의 집 안에서만 존재하던 사람들이, 오늘만큼은 같은 눈밭에서 함께 떠들고 웃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눈썰매 길은 더 단단해지고, 속도는 더 빨라졌다. 아빠는 아이들에게 약속을 하나 더 건넸다.

“여기까지는 괜찮은데, 이 선을 넘으면 안 돼. 이 선 너머는 미끄러우니까 꼭 여기까지만 타자.”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늘 그렇듯 한 번쯤은 그 선을 시험해 보고 싶어하는 장난기 어린 표정을 잠시 숨겼다. 하지만 아빠들의 눈은 그 속마저도 이미 알고 있는 듯 부드럽게 따라다녔다.

몸이 충분히 달아오르자, 아이들은 새로운 놀이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아빠, 이제 눈사람 만들자. 눈사람 없으면 겨울놀이 아니지.”

아파트 단지 중앙 화단 옆 넓은 공간이 눈사람을 만들기 좋은 장소로 점찍혔다. 아직 아무 발자국도 남지 않은 새하얀 눈밭은 마치 캔버스처럼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는 가장 먼저 눈을 한 덩이 크게 뭉쳤다. 어깨로 안을 수 있을 만큼만 뭉친 공을 바닥에 내려놓고 굴리기 시작하자, 눈이 겹겹이 붙으며 점점 커졌다.

“이렇게 굴리면 저절로 커지는 거야. 방향을 조금씩 바꾸면서 굴리면 동그랗게 만들어져.”

아이들도 각각 작은 눈덩이를 만들어 굴리기 시작했다. 둘째의 눈덩이는 자꾸 한쪽으로만 뭉쳐져 이상한 모양이 되었지만, 그조차 귀여운 실패처럼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 키를 넘지는 못해도 허리춤쯤까지 올라오는 큼직한 눈덩이가 하나 완성되었다. 그 위에 올릴 머리 부분을 만들기 위해 이번에는 조금 작은 눈덩이를 굴렸다. 첫째와 둘째, 그리고 옆동에서 같이 놀기 시작한 친구들까지 합세해 둘이서 하나를 감싸 안고, 힘을 합쳐 굴렸다. 누군가는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다들 배를 움켜쥐며 웃어넘겼다.

아이들과 아빠가 함께 만드는 커다란 눈사람과 여러 개의 작은 눈사람 랜덤 이미지
아파트 화단 옆에는 각기 다른 표정을 가진 눈사람 가족이 차례대로 줄을 섰다.

드디어 몸통과 머리가 포개졌다. 아빠가 조심스럽게 머리 눈덩이를 들어 올려 몸통 위에 올리자, 아이들의 입에서 “와아!” 하는 감탄사가 터졌다. 이제는 눈사람에게 표정을 심어 줄 차례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가까운 화단에서 말라버린 나뭇가지를 몇 개 모을 수 있었다. 아이들은 가장 길쭉하고 곧게 뻗은 가지를 눈사람 팔로 정했다. 마치 누군가를 안아 주려는 듯 두 팔을 벌린 눈사람의 모습은, 오늘 하루 내내 함께 웃어 준 아빠들의 모습과도 닮아 있었다.

눈사람의 눈과 입은 작은 돌멩이와 솔잎, 그리고 검은색 단추 모양의 자갈을 이용해 표현했다. 첫째는 눈동자를 최대한 동그랗게 만들어 귀여운 표정을 만들려 했고, 둘째는 입 부분에 돌을 더 많이 꽂아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으로 완성했다.

“얘는 분명히 노래 잘할 것 같아. 이렇게 크게 웃고 있잖아.”

아이들은 눈사람에게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단지 눈이, 눈사람이야. 우리 아파트 단지 눈이.”

누군가가 그런 말을 꺼내자, 아이들은 눈사람을 ‘눈이’라고 부르기로 합의했다.

눈사람 옆에는 손바닥만 한 작은 눈사람들이 줄줄이 세워졌다. 둘째가 만든 눈사람은 머리와 몸통의 구분이 거의 되지 않아서, 옆으로 쓰러질 듯 아슬아슬해 보였다. 그러나 아빠가 뒤에서 살짝 받쳐주며 모양을 다시 잡아주자, 그 눈사람도 당당히 서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저마다 표정도, 크기도 다른 눈사람들은 마치 아파트 단지에 새로 이사 온 눈 가족처럼 보였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하늘은 연보라색과 회색이 섞인 색으로 변해 갔다.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면서, 눈 위로 떨어지는 빛은 노란 원을 그리며 번져나갔다. 눈밭은 낮보다 오히려 더 환하게 빛났다. 아이들의 발자국이 촘촘히 박힌 눈길 위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이어졌다. 아빠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아이들과 눈사람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노을이 지는 겨울 저녁, 가로등 불빛 아래 가족과 눈사람이 함께 서 있는 모습 랜덤 이미지
노을과 가로등 불빛이 뒤섞인 겨울 저녁, 가족과 눈사람이 함께 사진 속에 담겼다.

“한 번 더, 이번에는 아빠도 같이!”

옆에서 지켜보던 이웃 아빠가 나서서 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했다. 아빠는 두 딸을 양쪽으로 끌어안고 눈사람 ‘눈이’ 옆에 섰다. 셋의 모자와 목도리, 눈 위에 비친 가로등 불빛, 그리고 약간 얼룩이진 패딩 위의 눈 자국까지, 그 순간의 모든 것이 프레임 안에 고스란히 담겼다. 사진을 확인하던 아빠는 웃으며 말했다.

“이거, 내년 겨울에도 다시 봐야겠다.”

손과 발이 슬슬 시려워지기 시작할 무렵, 엄마에게서 카톡 메시지가 왔다.

“라면 끓여놓을까, 떡국 끓여놓을까? 들어오면 바로 먹을 수 있게.”

아이들은 동시에 외쳤다.

“라면!”

아빠는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라면 두 개에 계란 두 개, 치즈 한 장 추가요.”

집 안의 따뜻한 국물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릇을 떠올리자, 추위가 갑자기 또렷이 느껴졌다. 그러나 아이들은 아직 놀 시간이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눈싸움 하자. 진짜 마지막!”

그렇게 시작된 ‘마지막’ 눈싸움은 여러 번 이어졌다. 아빠는 일부러 아이들에게 점점 더 많이 맞아주며, 자신의 장갑 안으로 스며드는 냉기를 마지막까지 버텨 보았다. 눈이 얼굴에 부딪힐 때마다 잠깐 숨이 턱 막혔지만, 곧 들이쉬는 찬 공기 속에서 그날의 기억들이 더 선명하게 새겨지는 것 같았다.

결국 엄마가 현관 앞까지 내려와

“이제 그만 들어와!”

라고 외칠 때가 되어서야, 아이들은 아쉬운 얼굴로 눈밭을 바라보았다. 눈사람 ‘눈이’와 그 주변의 작은 눈사람들에게 작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내일도 여기 있어. 녹지 말고.”

아빠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마 내일쯤이면 조금은 키가 줄어 있겠지. 그래도 흔적은 남아 있을 거야.’

계단을 올라오는 동안, 아이들은 오늘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되짚어 이야기했다.

“아빠, 기억나? 내가 아빠 어깨에 눈 맞췄을 때, 아빠 진짜 놀란 것 같았어.”

“그리고 언니가 눈썰매 타다가 거의 넘어질 뻔했는데 아빠가 잡았잖아. 그때 나도 같이 ‘꺄악’ 했어.”

그 작은 이야기들은 계단참마다 잠시 멈추어 서서 다시 한 번 웃음을 만들어냈다. 아빠는 숨이 조금 찼지만, 그 숨소리 사이로 아이들의 숨 가쁜 웃음이 섞이는 순간이 좋았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따뜻한 공기가 얼굴을 감싸 안았다. 장갑을 벗자 손끝이 얼얼했고, 양말을 벗자 발가락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곧장 거실로 뛰어 들어가 베란다 창문 쪽으로 달려갔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조금 전까지 함께했던 눈사람과 경사로의 눈썰매 길, 그리고 아직도 남아 있는 이웃 아이들의 발자국이 한눈에 들어왔다.

엄마가 부엌에서 끓여 오던 라면 냄새가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릇 앞에 앉은 아이들은 비로소 오늘의 마지막 겨울 놀이를 마무리하는 듯했다. 손을 녹이기 위해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따뜻한 국물을 한 모금씩 마실 때마다 몸속 깊은 곳까지 온기가 스며들었다. 아빠는 라면 면발을 후루룩 먹다가 문득 베란다 밖에 서 있는 눈사람 ‘눈이’를 다시 떠올렸다.

밤이 깊어질수록 아파트 단지는 조용해졌다. 다만 가끔씩 어린아이의 웃음소리와 눈을 밟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아빠는 아이들이 잠든 후 베란다로 나가 다시 한 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 서 있는 눈사람 ‘눈이’는 누군가가 씌워 준 듯한 작은 모자와 목도리까지 갖추고 있었다. 아마 다른 이웃이 몰래 추가로 장식을 더해 준 듯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하루 동안의 장면들이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머릿속에 흘러갔다. 눈싸움으로 시작해 눈썰매, 눈사람 만들기, 그리고 따뜻한 라면까지. 그 어떤 놀이공원 티켓이나 비싼 장난감도, 오늘 아이들이 눈 밭에서 누린 자유와 웃음만큼 값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아빠 자신이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눈의 감촉과 겨울의 소리를 다시 만나게 된 날이기도 했다.

다음 날 아침, 기상 예보에서는 기온이 급격히 올라가 눈이 녹을 거라고 예고했다. 아빠와 아이들은 잠에서 깨자마자 베란다로 달려갔다. 밤사이 조금 키가 줄어든 눈사람 ‘눈이’와, 부드럽게 무너져 내린 작은 눈사람들이 보였다. 하지만 그 모습조차도 이상하게 따뜻하게 느껴졌다. 눈은 결국 녹겠지만, 어제의 웃음과 추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빠, 다음에 또 이렇게 눈 많이 오면 또 나갈 거지?”

첫째의 물음에 아빠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눈이 오면, 우리는 또 나가서 눈사람 만들고 눈싸움하고 눈썰매 타야지. 그게 우리 집 겨울 공식이야.”

둘째는 아직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눈이 친구도 또 만들자.”

아빠는 웃으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광주의 겨울은 여전히 그리 길지 않을 수도 있고, 이렇게까지 많은 눈이 다시는 오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눈이 내리던 그 하루 동안 아파트 단지가 하나의 거대한 놀이터이자 추억의 무대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아빠와 딸들이 같은 눈밭 위에서 같은 온도로 웃고 뛰어다녔다는 사실이었다.

언젠가 시간이 더 흘러,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었을 때에도 이 날의 기억은 문득문득 떠오를 것이다. 광주에 드물게 내리던 폭설, 아파트 단지 경사로를 내려오던 눈썰매, 눈사람 ‘눈이’에게 붙여준 이름과 표정, 그리고 집에 돌아와 먹던 라면의 뜨거운 국물까지. 그 모든 것이 얇은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던 겨울이 아니라, 두 발로 직접 밟고 두 손으로 직접 만졌던 겨울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아빠에게도 이 날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아이들의 작은 손과 웃음을 온몸으로 느꼈던, 소중한 ‘광주의 눈 내린 하루’로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이 글은 광주에 내린 눈처럼, 언젠가 녹아 사라질 하루를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해 남겨 둔 작은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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