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겨울 첫 번째 대설주의보가 내려지던 날 새벽, 준호는 휴대폰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떴다. 창문 틈 사이로 스며드는 푸른빛이 방 안을 은은하게 물들이고 있었고, 유리창 밖으로는 밤새 쌓인 눈이 가로등 아래에서 천천히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한동안 멍하니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오늘, 그는 오랫동안 마음속에만 품어두던 얼음 낚시를 떠나기로 한 날이었다.
책상 위에는 어제 미리 챙겨 둔 장비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낡은 배낭, 얼음을 깨기 위한 아이스 드릴, 접이식 의자, 작은 가스 버너, 손난로 몇 개, 그리고 낚싯대.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아버지가 쓰던 오래된 릴이 달린 낚싯대였다. 손잡이 부분은 세월의 흔적으로 반질반질해져 있었고, 군데군데 흠집도 많았지만, 그 어느 새것보다도 더 단단해 보였다. 준호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손에 쥐며 어린 시절의 기억을 한 장 한 장 떠올렸다.
어릴 적 아버지는 겨울만 되면 산골 마을의 얼어붙은 호수로 그를 데려가곤 했다. 아직 키도 작고 손도 얼기 쉬웠던 그 시절, 준호는 두툼한 털모자를 푹 눌러쓰고 아버지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숨을 내쉴 때마다 흰 김이 피어나고, 얼음 위에 서면 문득 세상 전체가 뚝 하고 멈춘 듯한 고요가 찾아왔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웃으며 말했다. 조용한 곳으로 와야 마음속 소리도 잘 들린다고.
그랬던 아버지는 몇 해 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병원 복도에서 멍하니 앉아 있던 밤, 준호는 다시는 함께 얼음 위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이후로 그는 바쁘다는 이유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핑계로, 겨울마다 얼음 낚시를 미뤄왔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매년 눈이 올 때마다 알 수 없는 울림이 조용히 그를 두드리고 있었다. 마치 아버지가 여전히 어딘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그 울림은 올해 유난히도 크게 들려왔다. 취업 준비는 생각보다 훨씬 어렵게 느껴졌고, 면접에서도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친구들은 하나둘 회사에 들어가고, SNS에는 출근 인증 사진과 회식 사진이 넘쳐났다. 그럴수록 준호는 점점 더 작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이상한 방향으로만 걷고 있는 건 아닌지, 뒤처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의심하는 날이 많아졌다. 하루하루가 얇은 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러던 어느 밤, 우연히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던 아버지의 낚싯대를 꺼내어 손에 쥐는 순간, 그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겨울이 지나기 전에 꼭 한 번은 얼음 위에 서야 한다는 것을. 제대로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 스스로에게 묻고 싶은 이야기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그렇게 그는 오늘의 얼음 낚시를 계획했고, 눈이 펑펑 쏟아지는 이 새벽을 기다려온 것이다.
준호는 따뜻한 내복과 두꺼운 양말을 겹겹이 걸친 뒤, 방 안 불을 끄고 현관으로 나왔다. 문을 여는 순간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치며 스며들었다. 발 아래 눈이 뽀드득하고 밟히는 소리가 밤의 정적 속에서 또렷이 들렸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하늘은 어둑어둑했지만, 쌓인 눈이 주변의 빛을 반사해 주변은 희미하게 밝아 보였다. 그는 어깨에 배낭을 메고, 손에 장비를 들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길은 생각보다 미끄러웠지만, 그의 마음은 오랜만에 명확한 방향을 향해 걷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안내판에 표시된 시간에 맞춰 시골행 첫 차가 도착했고, 기사님은 반쯤 졸린 듯한 얼굴로 그를 맞았다. 버스 안 역시 텅 비어 있었다. 준호는 뒷좌석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버스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도시의 새벽 풍경이 뒤로 미끄러져 갔다. 불이 꺼진 상가들, 도로를 쓸어내리는 환경 미화원, 편의점의 형광등 불빛이 눈발 사이로 흐릿하게 번졌다.
버스가 도시 외곽을 벗어나자 풍경은 서서히 변해갔다. 낮은 건물 대신 눈 덮인 밭과 들판이 나타났고, 멀리 산들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창문에는 서서히 하얀 성에가 끼기 시작했다. 준호는 손바닥으로 성에를 문지르며 바깥을 바라보았다. 스멀스멀 떠오르는 긴장감과 설렘이 묘하게 뒤섞여 가슴이 조금씩 빨리 뛰었다. 어릴 때 아버지와 이 길을 함께 달리던 기억이 자연스럽게 스쳐 지나갔다. 그때의 버스 안에는 호기심 많은 어린 준호와, 창밖을 설명해 주는 아버지의 낮고 안정된 목소리가 가득했었다.
버스는 작은 시골 터미널에 도착했다. 그는 기사가 알려 준 대로 다시 마을 버스로 갈아탔다. 마을 버스는 훨씬 더 오래된 차였고, 좌석은 포근하게 낡아 있었다. 버스 안에는 아침 장을 보러 나가는 듯한 할머니 한 분과, 학교 가방을 멘 초등학생 둘이 전부였다. 버스는 좁은 산길을 따라 천천히 올라갔다.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이제 완전히 다른 세계처럼 느껴졌다. 도로 옆 나무마다 하얀 눈이 두껍게 쌓여 있었고, 작은 계곡은 이미 얼어붙어 얕은 얼음층 위로 눈이 소복이 덮여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눈길 끝에서, 마침내 얼어붙은 호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버스에서 내리자 차갑고 묵직한 공기가 폐 깊숙이 파고들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코끝이 아릿하게 시렸지만, 오히려 그 차가움이 정신을 또렷하게 깨우는 느낌이었다. 호수 주변에는 낮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눈 덮인 나무들이 서 있었다. 눈발은 여전히 조용히 내리고 있었지만, 호수 위는 온통 고요했다. 사람들의 말소리 대신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는 소리와, 먼 산에서 미세하게 미끄러져 내리는 눈의 소리만이 들렸다.
준호는 얼음 두께를 먼저 확인했다. 아버지에게 수없이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무엇보다 먼저 안전을 확인해라, 얼음이 네 발을 버틸 수 있는지부터 봐야 한다. 그는 얼음 가까이 다가가 발끝으로 조심스럽게 눌러본 뒤, 가장자리의 눈을 치우며 표면을 살폈다. 이미 이곳을 찾은 흔적이 있는지 작은 구멍이나 금이 난 곳도 유심히 살펴보았다. 다행히 얼음은 충분히 두꺼워 보였다. 그래도 안심이 들 때까지 그는 몇 번이고 자리를 옮겨가며 두께를 확인했다. 얇은 부분을 찾아내면 그쪽은 아예 피하고, 표면이 가장 단단해 보이는 지점을 마음속으로 표시해 두었다.
마음에 드는 지점을 고른 뒤, 그는 장비를 내려놓고 숨을 돌렸다. 주변은 고요했고, 눈발은 여전히 귓가를 스치듯이 내려앉았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 사이로 옅은 햇빛이 보일 듯 말 듯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그래, 오늘은 하루 종일 여기 있어도 좋겠다.’ 도시에서라면 계속해서 울렸을 알람과 메시지, 이메일, 공고 알림들이 이곳에서는 전혀 닿지 않는 것 같았다.
준호는 얼음 위에 작은 텐트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바람을 고려해 등지고 설 위치를 정하고, 팩을 얼음에 단단히 박았다. 손가락이 얼어붙을 듯했지만, 몸을 움직이자 서서히 열이 올라왔다. 텐트의 뼈대를 세우고 천을 씌운 뒤, 안쪽에 작은 매트와 접이식 의자를 놓았다. 아버지와 함께했을 때에는 늘 아버지가 먼저 손을 놀렸고, 그는 옆에서 도와주는 역할이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혼자 해내야 했다. 그 사실이 묘하게 쓸쓸하면서도 자랑스러웠다.
텐트 설치를 마치고 나서야 그는 아이스 드릴을 꺼내 얼음을 뚫을 위치를 정했다. 발 아래로 이어지는 호수의 깊이를 상상하며 드릴을 돌리기 시작하자, 얼음이 갈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처음에는 그 진동이 조금 두려웠지만, 이내 익숙해졌다. 얼음 가루가 하얀 연기처럼 주변으로 흩어지며 작은 구멍이 점점 깊어졌다. 어느 순간 저항이 조금 느슨해지는 기분과 함께 드릴이 스르르 내려갔다. 드디어 얼음을 관통한 것이다. 얼음 구멍 아래로는 어둡고 깊은 물의 기운이 느껴졌다.
준호는 구멍 주변을 정리한 뒤, 낚싯대를 천천히 준비했다. 줄을 살피고, 바늘을 확인하고, 작은 미끼를 달았다. 손가락이 얼얼했지만, 동작 하나하나에 집중하자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이 과정은 마치 오래된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수많은 겨울들이 손끝에 겹쳐지는 듯했다. 그는 낚싯줄을 조심스럽게 얼음 구멍으로 내려 보냈다. 물 깊이를 가늠하듯 천천히 줄을 풀어 내려가며 호수의 숨결을 느껴 보았다.
낚싯줄이 어느 정도 내려갔다 싶을 때, 그는 살짝 되감았다가 멈췄다. 물 속 어딘가에서, 아마도 아직 잠에서 덜 깬 물고기들이 조용히 떠다니고 있을 것이다. 그 상상을 하며 그는 낚싯대를 단단히 쥔 채 기다리기 시작했다. 텐트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으니, 바깥의 바람 소리는 한 겹 더 멀어지고, 안쪽에는 작은 고요만이 남았다. 가스 버너에 불을 붙여 따뜻한 물을 끓이자, 텐트 안은 금세 포근한 온기로 채워졌다.
그는 종이컵에 따끈한 커피를 따라 한 모금 마셨다. 쓰지만 달콤한 향이 입 안을 맴돌았다. 눈을 감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텐트 안에서는 그의 숨소리와, 아주 가끔 낚싯줄이 물결에 따라 미세하게 흔들리는 소리만이 들렸다. 도시에서라면 침묵이 어색했겠지만, 이곳에서의 침묵은 오히려 위로처럼 느껴졌다. 시계도, 일정도, 마감도 없는 하루. 오직 자신과 호수만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시간.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자, 자연스럽게 마음속 깊이 숨겨두었던 생각들이 떠올랐다. 스물다섯이라는 나이, 어쩌면 아직 충분히 어리다고도 할 수 있지만, 주변에서는 더 이상 무한한 가능성만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현실적인 계획, 안정적인 직장, 남들만큼은 해야 한다는 기준들이 그의 어깨를 무겁게 눌러 왔다. 면접에서 떨어질 때마다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했지만, 자기 최면처럼 느껴질 때도 많았다. 그는 조용히 속삭였다. 정말로 괜찮은 건가, 아니면 괜찮아지는 척을 하고 있는 걸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떤 대답을 억지로 찾아낼 필요는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얼음 아래의 물고기들처럼, 아직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떠다니고 있는 자신을 그저 있는 그대로 인정해 줘도 괜찮지 않을까. 꼭 무언가를 증명해야만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닐 테니까. 그는 낚싯대를 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며, 마치 자신의 불안까지 함께 잡아주기를 바라듯 물 속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손끝으로 전해지는 감각이 미세하게 달라졌다. 처음에는 착각인가 싶었지만, 곧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낚싯줄 어딘가에서 작은 떨림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는 숨을 죽이고 낚싯대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단하게 릴을 감기 시작했다. 얼음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생명의 움직임이 손을 통해 전해지는 듯했다. 그의 심장도 함께 빨리 뛰었다. 드디어 작은 물고기가 얼음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물고기는 크지 않았다. 누가 보면 금세 놓아주라고 말할지도 모를 정도였다. 하지만 준호에게 그 물고기는 단순한 한 마리의 어종이 아니었다. 겨울마다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감정, 다가가고 싶었지만 미루기만 했던 기억, 그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함께 올라온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물고기를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적셔 그것을 들어 올렸다. 차가운 비늘의 감촉이 손바닥에 선명하게 와 닿았다.
그는 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고마운 마음을 담아 바라보는 눈을 가진 사람에게는, 물고기들도 더 자주 찾아온다고. 그 말의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그 말이 사실이라고 믿고 싶었다. 준호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와줘서 고맙다. 그리고 조용히 얼음 구멍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 물고기를 가져가 요리를 해 먹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오늘만큼은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 번 손에 쥐어본 생명의 무게를 다시 물 속으로 돌려보내는 일은 생각보다 묘한 기분을 선물했다. 물고기가 다시 얼음 아래 깊은 곳으로 사라질 때, 준호는 헤어지는 게 아니라 잠시 놓아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기대와 함께. 그렇게 첫 번째 물고기를 돌려보낸 뒤, 그는 이전보다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낚싯대를 다시 드리웠다.
바로 그때, 텐트 밖에서 바스락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눈을 밟으며 다가오는 소리였다. 문이 살짝 젖혀지더니, 두꺼운 패딩 점퍼와 털모자를 쓴 중년 남성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약간 수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여기서 낚시해도 되겠냐고, 주변을 좀 둘러보다가 텐트가 보여서 인사를 먼저 하고 싶었다고. 준호는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여 보냈다.
남자는 자신을 근처 마을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겨울마다 이 호수에 나와 얼음 낚시를 즐기는 것이 오랜 취미라고 했다. 그는 능숙하게 장비를 내려놓고, 텐트 문을 조금 더 열어 공기를 순환시키면서도 바람이 너무 들어오지 않도록 조절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커피를 나누어 마시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처음 만난 사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대화는 자연스러웠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혼자서 여기까지 온 것이냐고, 요즘 젊은 사람들 중에는 이런 곳까지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준호는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냥, 좀 멈춰서 생각해 보고 싶어서요. 남자는 그 말에 잠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도 젊었을 때는 앞만 보느라 주변을 잘 보지 못했고, 쉬어가는 법을 몰랐다고. 결국 그런 삶이 쌓여 어느 날 갑자기 크게 지쳐 버렸다고.
그때 우연히 이 호수를 알게 되고, 겨울마다 찾아와 얼음 위에 앉아 있다 보면 마음이 조금씩 회복되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물고기가 잘 잡히든 잡히지 않든, 중요한 것은 그저 이 자리에 나와 있다는 사실 자체였다고. 남자는 말했다. 멈춘다고 해서 인생이 망가지는 건 아니라고. 오히려 멈추지 못하면 언젠가는 무너진다고. 잠시 느려지는 시간 속에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그 말을 듣는 동안, 준호는 계속해서 얼음 구멍 속을 바라보았다. 물 표면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하게 흔들렸고, 그 아래에서는 마치 묵묵한 시간이 흘러가는 것 같았다. 그는 조용히 고백하듯 말했다. 사실 요즘 많이 불안했다고.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 같고, 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뭘 좋아하는지조차 가끔 헷갈릴 때가 있다고. 사람들에게는 괜찮은 척 웃지만, 속으로는 늘 타임어택 게임을 하는 것처럼 초조했다고.
남자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그 불안은 아마 살아 있다는 증거일 거라고. 아직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라고. 그리고 그런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자기 길을 찾는다고. 본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단단한 사람일 거라고. 그의 말투는 과장되지 않았고, 위로하려는 의도도 지나치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한 말 한마디가 더 깊이 마음에 스며들었다.
두 사람은 그 뒤로도 한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자가 어린 시절 이 호수에서 미끄러져 넘어졌던 이야기, 첫 연애에 실패한 뒤 눈보라 치는 날 이곳에 와 하루 종일 얼음 위에 앉아 있었다는 이야기, 도시에서 일하다가 번아웃이 와 결국 고향으로 내려오게 된 이야기까지. 그 속에는 웃음도, 아쉬움도, 후회도, 작은 성취도 함께 묻어 있었다. 준호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깨달았다. 사람마다 사는 모습은 다르지만, 누구에게나 버거운 계절이 찾아오고, 그 계절을 건너는 방식은 저마다 다를 뿐이라는 사실을.
시간은 어느새 정오를 지나고 있었다. 텐트 문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조금씩 밝아지더니, 호수 위 전체를 부드럽게 감싸기 시작했다. 눈발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지만, 햇빛과 섞이면서 마치 작은 별들이 천천히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배가 고파진 두 사람은 각자 준비해 온 음식을 꺼냈다. 남자는 집에서 직접 만들어온 따끈한 어묵탕을 보온병에 담아왔고, 준호는 편의점에서 사 온 주먹밥과 컵라면을 꺼냈다. 텐트 안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구수한 향기가 가득 퍼졌다.
따끈한 국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온몸에 생기가 도는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꽁꽁 얼어붙어 있던 마음 한 구석도 함께 풀리는 것 같았다.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 인생도 얼음 낚시랑 비슷하다고. 준비를 철저히 한다고 해서 꼭 원하는 걸 얻는 건 아니고, 반대로 아무 기대 없이 왔다가 뜻밖의 걸 건질 때도 있다고. 중요한 건, 그래도 그 자리에 앉아 줄을 드리우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그 말에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낚싯대를 손에 쥔 채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도,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고 싶다고.
점심을 먹고 난 뒤, 남자는 잠시 다른 곳을 둘러보고 오겠다고 하며 텐트 밖으로 나갔다. 혼자가 된 준호는 텐트 문을 살짝 열어두고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아이 몇 명이 눈싸움을 하고 있었고,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함께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모습이 부러우면서도,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을 이렇게 온전히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다시 낚싯대를 잡고, 얼음 아래의 고요에 귀를 기울였다.
이번에는 물고기가 쉽게 잡히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줄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초조하지 않았다. 애초에 오늘의 목표는 물고기를 많이 잡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대신 그는 마음속에서 줄곧 피하고만 오던 질문들을 한 번씩 떠올렸다. 정말로 원하는 일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왜 이렇게 쉽게 움츠러드는가. 답을 당장 내리지 않아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허락하며, 그는 그 질문들을 곱씹었다.
이윽고 해가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호수 위로 떨어지는 빛의 각도가 달라지자, 얼음 표면은 은색과 분홍빛, 옅은 푸른빛이 섞인 기묘한 색으로 반짝였다. 하늘은 서서히 보랏빛으로 물들었고, 멀리 산 능선은 그림자처럼 짙어졌다. 그 순간, 그는 문득 아버지와 함께 보던 겨울 노을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그때 이렇게 말했었다. 노을은 하루가 끝나서 슬픈 게 아니라, 하루를 잘 버텨낸 사람들에게만 보여주는 보상 같은 거라고.
그 말을 떠올리며, 준호는 오늘의 자신을 떠올렸다. 도시에서 벗어나 이 먼 길을 온 것, 익숙하지 않은 장비를 혼자 준비한 것, 얇은 얼음과 깊은 물을 두려워하면서도 결국 얼음 위에 앉아 줄을 드리운 것. 그 모든 것이 어쩌면 그가 스스로에게 건넨 작은 용기였을지도 모른다. 비록 인생의 큰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한 걸음은 분명히 나아간 것이다. 그는 다시 한 번 길게 숨을 내쉬며, 이 감각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뒷정리를 시작하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시도해 보기로 했다. 그는 낚싯줄을 살짝 더 깊이 내려보낸 뒤, 눈을 감고 조용히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끝에 또 다른 떨림이 전해졌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조금 더 묵직한 느낌이었다. 그는 침착하게 릴을 감았다. 물 속 어딘가에서 버티는 힘과 자신의 힘이 팽팽하게 맞부딪히던 순간, 갑자기 줄에 걸린 무게가 위로 확 올라왔다. 두 번째 물고기는 첫 번째보다 조금 더 컸고, 비늘에는 노을빛이 은은하게 반사되고 있었다.
그는 잠시 그 물고기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물고기를 다시 물 속으로 돌려보냈다. 오늘은 무엇인가를 잡고 돌아가는 날이 아니라, 내려놓고 돌아가는 날이어야 할 것 같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 하루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의 손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것을 쥐고 있는 것 같았다. 여전히 불안하고, 여전히 막막하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는 힘. 다시 시작해 보자고 조심스럽게 속삭일 수 있는 용기.
뒷정리를 마치고 텐트를 접은 뒤, 그는 마지막으로 호수 위를 천천히 걸었다. 눈은 여전히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고, 발자국은 금세 하얀 층 속에 묻혀 버렸다. 잠시 뒤에 올 사람들은 이곳을 걸었던 그의 흔적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곳에 있었던 사실을, 오늘 하루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이 얼음 위에 서 있었는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그 자신이었으니까.
마을 버스를 타고 터미널로 내려가는 길, 창밖으로는 어느새 어둠이 내려 앉기 시작했다.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집집마다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버스 안은 따뜻했고, 엔진 소리가 자장가처럼 일정하게 울렸다. 그는 창가에 머리를 살짝 기대고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는 호수 위의 노을과, 텐트 안의 따끈한 김, 그리고 중년 남자가 건넨 담담한 말들이 잔잔한 파도처럼 떠올랐다.
도시에 도착했을 때, 밤은 이미 깊어져 있었다. 네온사인과 자동차 불빛이 섞인 도심의 공기는 여전히 차갑고 분주했다. 사람들은 서둘러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고, 거리에는 익숙한 프랜차이즈 카페와 편의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풍경은 어제와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그는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가로등 아래 서서 눈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도시의 하늘에도 작은 눈송이들이 느리게 떨어지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알 수 있었다. 내일도 여전히 불안할 것이고, 면접에서 또 떨어질 수도 있다. 삶은 여전히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은 이제 도망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불안과 막막함을 끌어안은 채로도, 여전히 줄을 드리우고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얼음 아래 깊은 곳에서 언젠가 다시 떠오를 작은 빛을 믿으면서, 묵묵히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집으로 돌아온 뒤, 그는 젖은 장비들을 꺼내어 정성스레 닦았다. 낡은 낚싯대의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어내리며, 조용히 속삭였다. 아버지, 나 잘 다녀왔어요. 혼자였지만, 하나도 외롭지 않았어요. 언젠가 또 다시 겨울이 오면, 오늘의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얼음 위에 서 보겠다고. 그때는 지금의 자신보다 조금 더 단단한 사람이 되어 있기를, 조금 더 자신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기를 바라며.
눈이 많이 내리던 어느 겨울날의 얼음 낚시는 그렇게 끝났다. 그러나 그 하루가 남긴 여운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잠자리에 들기 전, 창밖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여전히 눈은 조용히 내리고 있었고, 가로등 불빛 속에서 천천히 춤추듯 날리고 있었다. 준호는 미소를 지으며 불을 끄고 이불 속으로 몸을 파묻었다. 내일도 쉬운 날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다시 시작해 볼 수 있다고 마음속으로 되뇌며 눈을 감았다.
가장 추웠던 계절에, 그는 오히려 가장 따뜻한 무언가를 얻었다. 얇은 얼음 위를 걷는 듯 불안하던 날들 사이에서, 잠시 멈춰 서 자신과 마주 본 시간. 그것이 바로 얼음 낚시가 그에게 선물한 진짜 수확이었다. 언젠가 또 다른 겨울이 찾아오고, 눈이 많이 내리는 어느 날이 온다면, 그는 다시 그 호수를 찾아갈 것이다. 그때도 여전히 두렵고 흔들리겠지만, 그는 알고 있을 것이다. 얼음 아래 어둠 속에도, 언젠가 떠오를 빛이 조용히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