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 속으로 떠난 그녀의 야외캠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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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 속으로 떠난 그녀의 야외캠핑
연말, 도시의 불빛 대신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자신만의 낭만을 찾고 싶었던 한 여성의 이야기. 차창을 두드리던 눈송이가 장작불의 온기로 스며들기까지, 폭설이 만든 하룻밤의 기록.
한 해의 끝자락이 다가올수록, 사람들의 약속과 모임은 더 분주해졌다. 회사 단톡방은 송년회 공지로 쉴 새 없이 울렸고, 거리에는 캐럴이 흘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모든 것 속에서 한은서는 점점 더 고립되는 기분을 느꼈다.
핸드폰 화면 위로 오가는 웃음 이모티콘들 사이에서, 문득 그녀는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진짜로 즐겁나, 아니면 즐거운 척에 익숙해진 걸까. 눈이 온다는 일기예보를 본 순간, 그녀의 마음은 조용히 결심을 굳혔다.
올해의 마지막 주말, 폭설이 예보된 바로 그날. 사람들과의 약속 대신, 눈과 불빛과 침묵이 기다리는 곳으로 떠나 보기로.
이미지는 무작위로 불러온 눈 내리는 캠핑 장면입니다. 실제 이야기 속 장소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
토요일 새벽,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시간.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뜬 은서는 조용한 집 안을 한 번 둘러보았다. 텅 빈 거실, 미처 치우지 못한 머그컵, 정리되지 않은 책과 메모들. 그리고 현관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차박용 박스와 캠핑 장비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따뜻한 이불 속에서 한 번쯤은 더 뒤척였을 시간인데, 오늘만큼은 몸이 먼저 일어났다. 그녀는 전기포트를 올려둔 뒤, 창문을 슬쩍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치고, 도시의 새벽 냄새가 훅 들어왔다.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든 공기가 겨울의 시작을 또렷하게 알렸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인스턴트 커피 가루가 머그컵 안으로 떨어졌다. 김이 천천히 오르는 진한 향기 사이로, 그녀는 오늘 가야 할 길을 머릿속으로 한 번 더 그려 보았다.
올해의 마지막 주말. 나는 사람 많은 술자리 대신, 폭설 내리는 산 위에서 혼자 밤을 보내기로 했다.
그런 생각 자체가 조금은 무모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오래 전부터 기다려온 사건처럼 설렘이 팔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회사에서 받은 연말 보너스의 일부를 투자해 간신히 장만한 작은 차량용 히터, 도톰한 거위털 침낭, 보들보들한 기모 양말과 지난달 충동적으로 구매한 랜턴까지.
다 맞춰놓고도 사실 한 번도 제대로 사용해 본 적 없는 것들. 오늘이야말로 그들을 진짜 제자리로 데려다 놓는 날 같았다.
짐을 차에 싣는 동안 아직 어두운 하늘에서는 눈 대신 냉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아파트 단지의 가로등 불빛이 노랗게 번지는 사이, 잠든 도시를 몰래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출근길에 늘 지나던 대로였지만, 오늘만큼은 완전히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길처럼 느껴졌다.
고속도로에 올라탔을 때, 라디오에서는 연말 특집 방송이 흘러나왔다. 청취자들이 보낸 올해의 순간들, 놓쳐버린 고백, 실패한 도전, 새로 시작한 사랑, 또 그 모든 것의 배경이 되어 준 노래들.
은서는 볼륨을 조금 줄이고, 도로 위에 시선을 고정했다. 하늘은 아직 회색에 가까웠지만, 저 멀리 북쪽 산맥 쪽으로는 희미한 눈구름이 겹겹이 쌓이는 모양이 보였다.
네비게이션 화면에는 목적지가 1시간 반 남았다고 떠 있었다. 폭설 예보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 예약 취소가 몇 건이나 나와, 겨우 빈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는 생각에, 그녀는 조금 우스워졌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피하려는 날에, 나는 굳이 그곳으로 가고 있다. 마치 일부러 거꾸로 걷는 사람처럼.
산이 가까워질수록, 하늘의 색깔이 달라졌다. 뿌옇게 번지던 구름이 점점 묵직해지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와이퍼 위로 작은 눈송이가 알알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처음엔 빗방울 섞인 젖은 눈이었지만, 고도가 높아질수록 눈송이는 가볍고 부드러워졌다. 마치 누군가 솜을 뜯어 하늘에 뿌려 놓은 것처럼, 유리창 너머로 하얀 점들이 부드럽게 흩날렸다.
은서는 잠시 차를 갓길에 세웠다. 엔진 소리가 고요해지자, 눈 내리는 소리만이 세상을 채우는 듯했다. 창문을 조금 내리고 손을 내밀자, 차가운 눈송이들이 장갑 위에 내려앉아 천천히 녹아 내렸다. 그 짧은 순간조차 아깝다는 듯, 그녀는 그 모양을 눈에 꾹꾹 눌러 담았다.
화면으로 보는 눈과, 이렇게 직접 맞는 눈은 완전히 다르구나. 이 차가운 온기 때문에라도, 여기 오길 잘했다.
다시 시동을 걸고 조금 더 올라가자, 도로 옆 나무들의 가지마다 하얀 선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아직 사람의 발자국이 닿지 않은 순백의 눈 위로, 작은 짐승 하나가 지나간 흔적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도착한 캠핑장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입구에서 만난 관리인은 모자를 푹 눌러쓴 채 그녀를 바라보더니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 밤에 눈 많이 온대요. 혼자 오신 거예요?"
"네, 혼자예요. 혹시 너무 위험하면 말씀해 주세요. 바로 내려갈게요."
그녀의 대답에 관리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빈 사이트들 중에서도 가장 숲에 둘러싸인, 바람을 조금이라도 막아 줄 수 있는 자리를 골라 추천해 주었다.
"난로는 준비해 오셨죠? 혹시 모르니까, 문제 생기면 바로 관리동으로 오시고요."
은서는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건넸다. 낯선 곳에서 건네지는 작은 친절이 생각보다 깊은 온기를 가진다는 걸, 이 나이가 되어서야 조금씩 알게 되는 것 같았다.
사이트에 차를 대고 내리자, 눈은 이미 발목 근처까지 쌓인 상태였다. 발을 디딜 때마다 폭신한 소리가 났다. 눈 위를 걸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그 둔탁하고도 둥근 소리. 마치 세상이 그녀의 발걸음을 부드럽게 받아 주는 듯한 기분.
텐트를 치기 전에, 은서는 잠시 자기가 서 있는 자리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사방이 눈에 덮인 나무들로 둘러싸인 작은 공터. 조금 멀리에는 얼어붙은 계곡이 흐르고, 산 중턱에는 잔잔한 안개가 걸려 있었다.
도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말은 자주 했지만, 실제로 이런 풍경 한가운데 혼자 서 있는 건 처음이었다. 막연한 동경이 실제로 눈앞에 펼쳐지는 것과 마주하면, 사람은 순간적으로 말을 잃게 되는지도 몰랐다.
숨이 눈 앞에서 하얗게 흩어졌다. 손끝이 조금씩 얼어붙을 때쯤, 마침내 작은 원룸만 한 돔 텐트가 눈 위에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텐트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직은 차갑고 텅 비어 있었지만, 곧 이곳이 오늘 밤의 집이 될 거라는 사실이, 약간은 감격스럽게 느껴졌다.
차로 돌아와 짐을 하나씩 옮겼다. 침낭, 두꺼운 매트, 털 담요, 랜턴, 작은 캠핑 테이블, 버너와 코펠, 그리고 기름 냄새가 은근하게 풍기는 등유 난로까지. 눈발은 점점 굵어지고 있었지만, 그녀의 움직임은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면, 마음도 덩달아 안정을 찾는 것 같다. 생각이 너무 많을 땐, 손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큰 위로가 된다.
난로의 심지를 확인하고, 작은 불을 붙이자 텐트 안에는 금세 노란빛이 번졌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피어오르는 온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이불 같았다. 아직 충분히 따뜻해지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했지만, 그 방향으로 천천히 나아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캠핑장의 낮은, 시간의 흐름이 도시와는 전혀 달랐다. 여기엔 회의 일정도, 마감일도, 알림 소리도 없었다. 대신 눈의 양과 바람의 방향,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빛의 농도가 시간을 가늠하게 해 주었다.
은서는 작은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컵라면과 김밥을 꺼내었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메뉴였지만, 이 풍경 속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조합 같았다.
눈은 점점 굵어졌다. 텐트 위로 떨어지는 눈송이들이 포근한 이불처럼 겹겹이 쌓였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거의 없었다. 가끔씩 옆 사이트에서 들려오는 웃음 소리와, 나무에서 눈이 한꺼번에 떨어지는 툭, 하고 둔탁한 소리 정도.
그녀는 텐트 문을 반쯤 열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세상이 모두 흑백 사진이 된 듯한 정적 속에서, 랜턴의 따뜻한 불빛만이 작은 색깔을 더했다.
그때, 저 멀리 관리동 쪽에서 기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누군가 조용히 코드를 튕기고 있었다. 정확한 곡은 잘 모르겠지만, 연말이 되면 어디선가 꼭 한 번쯤은 들리는 듯한 감성적인 멜로디였다.
그녀는 소리를 쫓아갈까 잠시 고민했다. 눈발을 헤치고 낯선 사람들 사이에 앉아 손난로를 돌려가며 기타 소리를 듣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살짝 저었다.
오늘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 자신의 이야기와 좀 더 오래 마주 보고 싶었다.
대신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평소 잘 듣지 않던 클래식 재생 목록을 틀었다. 눈발과 어울리는 피아노 선율이 텐트 안에 잔잔하게 깔렸다.
음악을 배경으로, 그녀는 조용히 다이어리를 펼쳤다. 평소라면 몇 줄 끄적이다 말았겠지만, 오늘만큼은 단어들이 스스로 종이를 채워 나가는 듯했다.
올해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 참아 온 말들, 끝내 하지 못한 질문들, 남들 눈에는 별일 아니었을지 몰라도 그녀에게는 밤마다 다시 떠오르던 장면들을 천천히 적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생각보다 쉽게 상처받고, 생각보다 오래 기억하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만큼 깊이 사랑하고, 그만큼 오래 감사해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올해의 나를, 너무 함부로 평가하지 말자.
글을 다 쓰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마치 오래된 상자 속에 뒤섞여 있던 기억들을 날짜별로 정리해 차곡차곡 쌓아 둔 느낌이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산의 색깔이 또 한 번 변했다. 눈 덮인 나무들이 서서히 남색으로 물들고, 하늘은 보랏빛에서 검푸른 색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은서는 텐트 밖으로 나와 랜턴을 높이 걸었다. 노란빛이 눈 위를 둥글게 비췄다. 그 안은 마치 작은 무대 같았다. 그녀 혼자만의 공연을 위해 준비된, 관객 없는 무대.
저녁 준비를 위해 버너에 불을 붙였다. 오늘의 메뉴는 간단한 전골과 구운 소시지였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자, 눈 내리는 풍경 사이로 고소한 냄새가 퍼져 나갔다.
은서는 핸드폰으로 기상 예보를 한 번 더 확인했다. 밤새 눈이 많이 오긴 하겠지만, 새벽이 되면 점차 잦아들 거라 되어 있었다. 관리인의 "너무 쌓이면 아침에 제설기 돌릴게요"라는 말도 떠올랐다.
걱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이 순간 느끼는 평온함이 그 모든 불안을 잠시 뒤로 밀어냈다.
식사를 마친 뒤, 그녀는 텐트 앞의 작은 눈밭 위에 서서 조심스럽게 한 글자를 썼다.
"안녕"
그리고 그 옆에 또 한 글자를 더했다.
"고마워"
누군가를 향한 말 같기도 했고, 자신을 향한 말 같기도 했다. 어쩌면 이 겨울이라는 계절 자체에게 건네는 인사일지도 몰랐다.
밤이 깊어질수록, 폭설은 절정으로 향했다. 텐트 위로 쿵, 쿵, 하고 눈이 떨어지는 소리가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바람이 세게 불 때마다 텐트 천이 살짝 흔들렸지만, 팩으로 단단히 고정한 줄이 흔들림을 붙잡아 주고 있었다.
은서는 텐트 안으로 들어와 지퍼를 올렸다. 난로의 불은 한층 더 밝게 타올랐다. 이제 텐트 안은 작은 별 하나처럼 어두운 숲 속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두꺼운 양말을 한 번 더 챙겨 신고, 침낭 안으로 몸을 깊숙이 밀어 넣었다. 바깥의 공기는 여전히 매서웠지만, 이 작은 공간 안에는 충분한 온기와 안락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집. 그러나 오늘 밤만큼은, 그 어느 곳보다도 안전하고 자유로운 공간.
핸드폰 화면을 켜니, 도시에서 온 메시지들이 몇 개 쌓여 있었다.
"오늘 안 나온다고? 눈 장난 아니야 ㅋㅋ"
"폭설인데 어디 갔어? 집이 최고지."
"연말인데 사람 좀 만나. 그러다 진짜 산에 취미 들겠어."
그녀는 잠시 엄지손가락을 멈추더니, 메시지 창을 나가 카메라 앱을 켰다. 텐트 안에서 난로와 랜턴이 만들어 낸 노란빛, 창문 밖으로 보이는 새하얀 눈밭, 그리고 침낭 위에 놓인 다이어리와 펜.
조용히 셔터를 눌렀다.
그 사진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녀는 그 어떤 필터도, 글자도, 이모티콘도 올리지 않은 채 단 한 명에게만 사진을 보냈다.
"나, 여기까지 왔어. 생각보다 괜찮아."
답장은 한참 뒤에 도착했다.
"추울 텐데, 조심해. 근데 진짜 멋있다. 언젠가 나도 따라 가 보고 싶네."
은서는 천천히 웃었다. 이 폭설 속에서도, 누군가가 건네는 짧은 문장은 난로 불만큼이나 훈훈한 온기를 가지고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눈은 더욱 조용하게 내렸다. 세상이 모두 깊은 수면에 빠져드는 시간 같았다. 텐트 안에서 듣는 폭설의 소리는 마치 오래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백색소음처럼 은은하게 마음을 감쌌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올해를 거슬러 올라갔다. 퇴근길에 혼자 울던 밤들, 버스 창문에 비친 초라한 얼굴을 외면하던 순간들, 동시에 누구보다 씩씩한 척 웃으며 농담을 던지던 낮의 시간들.
그리고 그 모든 장면의 끝에서, 지금 이 폭설 속 야외캠핑이 있었다.
어쩌면 나는, 무작정 도망치러 온 게 아니라 드디어 나 자신을 만나러 온 걸지도 모른다.
눈을 감고 있자니, 난로의 따뜻한 공기가 서서히 눈꺼풀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억지로 버티지 않았다. 오늘 하루 동안 충분히 많이 보고, 듣고, 느렸다. 이제는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폭설이 텐트를 덮고, 어둠이 산을 감싸 안은 그 밤. 은서는 오랜만에 정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알람도, 메시지도, 도시의 소음도 닿지 않는, 아주 멀고 고요한 곳으로.
다음 날 새벽, 아직 해가 뜨기 전. 은서는 이상하게도 자연스럽게 눈을 떴다. 먼저 느껴진 것은 침낭 안의 포근함이었고, 그 다음으로는 텐트 밖 공기의 차가운 기운이었다.
텐트 지퍼를 조금 내리고 바깥을 내다본 순간, 그녀는 숨을 멈추었다.
세상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무의 갈색 줄기가 보이던 숲은, 이제 완벽한 흰색과 푸른색의 세계가 되어 있었다. 눈은 허벅지까지 차오를 정도로 소복하게 쌓여 있었고, 아직 아무의 발자국도 닿지 않은 표면은 마치 누군가 정성스럽게 펼쳐 놓은 흰 천 같았다.
이렇게까지 조용한 아침을, 내 삶에서 몇 번이나 더 만날 수 있을까.
그녀는 서둘러 옷을 껴입고 텐트 밖으로 나왔다. 숨을 내쉴 때마다 입김이 길게 흩어졌다. 하늘은 아주 옅은 보랏빛을 머금고 있었고, 동쪽 산등성이 위로는 서서히 해가 얼굴을 내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은서는 발자국이 하나도 없는 눈밭 위에 조심스럽게 첫 발을 내디뎠다. 눈이 폭신하게 무너지며, 어제와는 다른 소리가 났다. 밤새 얼어붙은 눈이, 그녀의 체중에 맞춰 천천히 깨지는 소리.
그 길을 따라 몇 걸음 더 나아가자, 나무 사이로 작은 전망이 트이는 지점이 나타났다. 거기서 내려다본 풍경은 숨이 막힐 정도로 고요했다.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으려다, 다시 집어넣었다. 대신 그 자리에서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겨울 산의 차가운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었다가, 다시 천천히 빠져나갔다. 마치 몸 안의 오래된 먼지를 함께 쓸어내는 것처럼.
텐트로 돌아온 뒤, 그녀는 간단히 아침을 차렸다. 어제 남은 전골에 물을 조금 더 붓고 끓였다. 밤새 굳어 있던 국물이 다시 뜨거워지자, 텐트 안에는 또다시 따뜻한 향기가 가득 찼다.
식사를 마친 뒤, 본격적인 철수 준비를 시작해야 했다. 해가 더 높이 떠 버리기 전에, 눈이 더 녹기 전에, 도로 사정이 나빠지기 전에 내려가야 했다.
눈에 덮인 텐트를 털어 내리고, 얼어붙은 팩을 빼기 위해 장갑 낀 손으로 몇 번이고 땅을 두드렸다. 차가운 금속과 단단한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텐션을 올려 주었다.
짐을 하나씩 차에 실으며, 그녀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물었다.
이 하룻밤의 기억이, 앞으로의 나에게 어떤 의미로 남을까.
어쩌면 오늘 이 폭설 캠핑은, 언젠가 힘든 날들이 다시 찾아왔을 때 떠올릴 수 있는 하나의 장면이 될지도 몰랐다.
아무도 없는 산속, 눈이 허벅지까지 차올랐던 그 아침, 나는 분명히 혼자였는데, 전혀 외롭지 않았다.
체크아웃을 하러 관리동으로 갔을 때, 관리인은 그녀를 보자 안도한 표정으로 웃었다.
"밤에 바람 불어서 걱정했는데, 잘 주무셨어요?"
"네, 생각보다 정말 좋았어요. 아마 평생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그녀의 대답에 관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눈 많이 오는 날 일부러 찾아오는 분들은, 다 자기만의 이유가 있더라고요. 아무튼, 무사히 내려가셔서 다행입니다."
은서는 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다시 산을 내려오는 길, 도로 옆 풍경은 올라올 때와는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밤새 내린 눈이 도로를 덮어, 제설차가 지나간 자국만이 길을 만들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는 가족을 태운 SUV, 커다란 캠핑카들이 하나 둘 올라가고 있었다.
그녀는 라디오를 켜지 않은 채, 일정한 속도로 조용히 산길을 내려왔다.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어제의 장면들이 잔잔한 파도처럼 반복해서 떠오르고 있었다.
도시에 가까워질수록, 도로는 다시 익숙한 풍경으로 돌아왔다. 신호등, 버스 정류장, 편의점, 사람들. 어제와 똑같은 주말이 반복되는 것 같았지만, 그 속을 지나가는 그녀의 마음은 분명히 달라져 있었다.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 아침, 사실은 나만 조금 달라져 있는 그런 날이 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집 앞에 도착해 짐을 내리면서, 은서는 문득 어제 눈밭 위에 남겨 둔 글자를 떠올렸다.
"안녕"과 "고마워".
아마 지금쯤이면, 그 글자는 폭설에 덮여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기억 속에서는, 그리고 아마도 그 산의 겨울 한편에서는, 잠시나마 분명히 존재했던 인사로 남아 있을 것 같았다.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을 때, 따뜻한 실내 공기가 그녀를 감쌌다. 평소라면 숨 막히게 느껴졌을 빌딩의 난방 냄새도 오늘만큼은 왠지 반가웠다.
짐을 대충 정리해 두고 샤워를 마친 뒤,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아 다시 다이어리를 펼쳤다. 어제 텐트 안에서 적어 둔 문장들 아래에 새로운 문장을 덧붙였다.
12월, 폭설 캠핑. 혼자 떠난다고 해서 꼭 외로운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고요 속에서 나는 나를 조금 더 선명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내년에도 힘들고, 흔들리고, 울컥하는 날들이 오겠지. 그래도 괜찮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단단하고, 훨씬 용감한 사람이었다.
문장을 다 쓰고 펜을 내려놓은 뒤, 은서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도시에도 늦은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산에서 보던 눈과는 다른, 조금 더 미세하고 가벼운 눈.
그럼에도 그녀는, 이 눈을 보며 산 위에서의 폭설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또 다른 겨울이 찾아왔을 때, 그 산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단지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한 번 자신에게 인사하고, 또 한 번 고마워라고 말하기 위해.
그날 밤, 그녀는 일기 마지막 장에 이렇게 적었다.
언젠가 누가 내게 "올해 가장 잘한 일이 뭐야?"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거다. 폭설이 내리던 그 날, 혼자서 산 위 캠핑장까지 운전해 올라간 일이라고.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의 진짜 연말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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