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붉게 물드는 계절이 찾아오면, 사람들은 주말마다 산을 찾는다. 누군가는 단풍 사진을 찍으러, 누군가는 그저 조용히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러, 그리고 또 누군가는 오래전부터 이어 온 약속처럼 같은 자리의 벤치에 앉으러 온다. 그런데 같은 시기, 같은 산을 향해 또 다른 사람들이 떠난다. 그들의 손에는 카메라 대신 무거운 장비가 들려 있고, 목에는 카메라 스트랩 대신 질식 위험을 막기 위한 보호구가 걸려 있다. 가을 산불이 잦아지는 시기, 소방관들의 가을은 언제나 조금 더 길고, 조금 더 뜨겁다.
올가을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가 뜸해진 10월 말, 바람까지 심술을 부리듯 골짜기를 타고 세차게 불어오던 날, 산자락에서 시작된 작은 연기가 순식간에 산허리를 타고 번져 나갔다.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은 창문 너머로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라보며 서로의 안부를 먼저 챙겼고,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 떠오른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누구보다 먼저, 누구보다 가까이 그 연기를 향해 달려갈 이들, 바로 소방관들이었다.
“산 하나가 탄다는 건, 나무만 타는 게 아니에요. 그 산을 바라보고 살던 사람들의 마음도 같이 타들어갑니다. 그래서 저희는, 가능한 한 작은 부분에서 끊고 싶은 거예요.”
지방 소도시의 한 119안전센터에서 일하는 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물이 든 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황갈색 잎이 포근하게 깔려 있던 산자락이, 이제는 검게 그을린 흙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단순한 풍경 변화 이상이었다. 신고가 접수되던 순간, 지휘 차량 안에서 울리던 무전기의 소리, 엔진이 한꺼번에 끼얹어 올리던 진동, 숨을 가쁘게 몰아쉬던 동료들의 얼굴이 아직도 그의 눈앞에 선명했다.
산불 출동은 도시 화재와 다르게, 준비부터가 길다. 장갑을 한 번 더 확인하고, 방화복의 지퍼를 끝까지 끌어올리며, 헬멧의 턱끈을 조일 때마다 몸이 조금 더 무거워지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 무게가 두렵기보다는, 오히려 마음을 붙잡아주는 앵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불길이 얼마나 거세든, 이 장비가, 옆에 서 있는 동료가 함께 버텨 줄 거라는 믿음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산불 현장의 공기는 독특하다. 축축한 낙엽 타는 냄새와 솔잎 타는 냄새, 그리고 먼 산 너머에서 날아온 흙먼지가 섞여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다. 안개처럼 옅게 깔린 연기 사이로 붉게 물든 단풍잎이 하나둘 떨어지며 바닥에 내려앉는다. 햇빛을 등지고 연기가 길게 뻗어나가면, 그 사이를 뚫고 걸어 들어가는 소방관들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흔들린다. 그 장면을 멀리서 바라보던 마을 사람들은, 말 없는 기도를 가슴속에서 꺼내 조용히 올린다.
그날 출동에 함께 나섰던 막내 대원 유진은 여름에 임용된 신참이었다. 아직 방화복의 주름마다 새것 티가 남아 있었고, 부츠 끈을 조일 때마다 긴장과 설렘이 동시에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하지만 산불 현장 앞에 서자, 설렘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눈앞의 불과 연기, 그리고 동료들의 지시에 집중해야 하는, 좀 더 단단한 마음만이 남았다.
첫날, 유진은 등짐펌프를 메고 가파른 산길을 올랐다. 어깨에 얹힌 20kg 남짓한 물통의 무게가 골반과 허리를 번갈아 눌렀고, 흙이 부서지는 소리가 발끝에서 잔잔하게 들려왔다. 땀은 마스크 안으로 흘러들었고, 눈가에는 잿가루가 가늘게 내려앉았다. 그런데 그 순간, 앞에서 걸어가던 선배 하나가 고개를 돌려 이렇게 말했다.
“힘들지? 그래도 이 물통 하나가, 저 아래 집 몇 채를 지키는 거라고 생각해 봐. 그러면 조금은 버틸 만해져.”
그 말은 피곤한 어깨 위에 올려진 또 하나의 무게였지만, 이상하게도 이전보다 더 곧게 서게 만드는 무게였다. 숨이 차올라도, 다리가 후들거려도, 물 한 방울도 허투루 흘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등줄기를 타고 이어졌다.
오후가 기울 무렵, 하늘은 붉은 노을과 산불 연기가 섞여 묘한 색을 띄었다. 헬기 한 대가 낮게 선회하며 물을 쏟아붓고, 그 아래에서는 소방관들이 흙을 퍼 올려 불길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피복선을 만든다. 큰 불길을 끊어 내더라도, 숨어 있던 작은 불씨가 다시 살아나 산등성이를 타고 달려가기 때문에, 그들의 눈은 늘 바위 틈과 마른 풀숲과 타다 남은 나뭇가지 끝을 살핀다.
어느 순간, 바람 방향이 바뀌며 연기가 골짜기로 밀려 내려왔다. 시야가 하얗게 흐려지고, 무전기 소리는 연기 사이로 찢겨 들렸다. 지휘관의 목소리가 짧고 단호하게 흘러나왔다.
“모든 팀, 위치 한 번씩 보고합니다. 바람 꺾일 때까지 불길 따라가지 말고, 사람부터 확인합니다.”
그 지시는, 언제나 그렇듯 당연한 것이었지만, 매번 들을 때마다 가슴을 쿵 하고 치고 지나갔다. 소방관들은 불을 끄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먼저 지켜야 할 것은 옆에 있는 사람, 그리고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그들을 지키지 못하는 순간들이 찾아오기도 한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현장에서는 유난히 서로의 이름을 자주 부른다. “대장님”이나 “선배님” 대신, “현우 형”, “유진아”, “선영 씨”처럼, 마치 가족을 부르듯 이름을 나직하게 부른다. 불길이 거세질수록, 서로를 향해 뻗는 그 이름의 온도는 더 따뜻해졌다.
산 아래 마을에는 대피소가 차려졌다. 체육관 안에는 급히 챙겨 나온 가방들과 담요, 그리고 끌어안은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연기가 마을 가까이까지 내려온다는 소식에, 할머니들은 손에 쥔 약봉지를 몇 번이고 확인했고, 아이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눈으로 어른들의 표정을 살폈다.
그때,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체육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방금 전까지 산에서 내려온 티가 역력한, 그을린 얼굴의 소방관 한 명이었다. 헤드램프 자국이 선명히 남은 이마, 아직 완전히 벗지 못한 방화복, 그리고 땀과 재가 뒤섞인 머리카락.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였다.
그는 먼저 체육관 한가운데에 서서, 마을 사람들을 쭉 둘러보았다. 그리고 아주 짧게, 하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는 불길이 산 중턱에서 잡히고 있습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대피는 유지하시되, 당장 아래로 내려오는 일은 없을 것 같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여기서 서로 잘 좀 챙겨 주세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여기저기서 안도의 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고개를 끄덕이던 한 할머니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 우리 집은 괜찮겠어요?”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할머니에게, 소방관은 잠시 생각하더니 휴대전화 지도를 꺼내 산불 발생 지점과 바람 방향, 그리고 마을 위치를 차분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말이 끝나자마자 할머니는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하며 그의 손을 꼭 잡았다.손을 잡힌 순간, 소방관은 잠깐 숨을 골랐다. 산에서 내려오는 내내 긴장으로 굳어 있던 어깨가, 그 따뜻한 손의 온도에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그는 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그래, 이 손 하나를 지키려고 우리가 저 위에 있는 거지.”
가을 산불 시즌 동안, 소방서에는 야간 근무가 더 잦아진다. 낮 동안 산에서 불을 끄고 내려와 장비를 정비하고 나면, 이미 하늘은 어둑해져 있다. 젖은 방화복을 벗어서 건조대에 걸고, 깨끗이 씻어낸 헬멧을 제자리에 올려두는 일은 마치 하루의 인사를 나누는 의식처럼 반복된다.
근무 교대를 앞두고, 대원들은 잠깐의 휴식 시간마다 작은 에피소드를 나누곤 한다. 오늘 산에서 마주친 다람쥐 이야기, 연기 속에서 느닷없이 마주친 길 잃은 등산객 이야기, 그리고 마을에서 건네받은 따끈한 어묵 국물 이야기까지. 그 이야기들은 너무 작고 사소해서 뉴스에 나갈 일은 없겠지만, 소방관들의 마음을 붙잡아 주는, 소중한 조각들이었다.
어느 날은 산불 현장으로 올라가는 길가에, 누군가 쪽지와 함께 작은 초콜릿 상자를 놓고 갔다. 종이 위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소방관 아저씨들, 불 조심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집 앞 나무는 꼭 지켜 주세요. 그 나무 밑에서 우리 가족이 매년 사진 찍어요.”
유치원생쯤 되어 보이는 글씨체였다. 누가 썼는지, 언제 두고 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대원들은 그 쪽지를 돌려 읽으며 입가를 천천히 좁게 말아 올렸다.
반대로 마음이 철렁 내려앉는 순간들도 있다. 바람이 갑자기 바뀌어 매뉴얼대로 움직였음에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는 날, 흙더미가 무너져 내려 발이 잠깐 묶이거나, 연기가 갑자기 짙어져 시야를 잃어버리는 순간. 그럴 때면, 누구든 “괜찮습니까?”라는 말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고, “괜찮습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오기를 숨죽여 기다린다.
그 짧은 침묵이 한없이 길게 느껴지는 시간 동안, 소방관들은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두려움과 마주한다. 그럼에도 다시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이유는, 자신이 두렵다고 해서 다른 누군가를 그 자리에 홀로 두고 올 수 없다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단단한 마음 때문이다.
산불은 해가 진 뒤에도 쉽게 끝나지 않는다. 낮 동안 눈에 보이던 불꽃이 사그라진 것처럼 보여도, 나무뿌리 아래에 숨은 불씨는 여전히 뜨겁게 살아 있다. 그래서 밤새워 잔불을 정리하는 일은, 산불 진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과정이다.
밤하늘에는 별빛 대신 소방차 경광등의 붉은빛이 흘렀다. 불빛이 산자락의 그을린 나무들을 비추자, 한때 푸르렀던 숲이 검은 실루엣으로 서 있는 모습이 드러났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은 가운데, 장비 정리하는 소리와 무전기의 짧은 호출음만이 간간이 공기를 가르며 지나갔다.
그때, 휴식 구역 한켠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물을 마시던 유진이 종이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대장님, 아까 산길에서 고양이 한 마리 본 거 맞죠? 제가 너무 힘들어서 헛것 본 건 줄 알았는데요.”
옆에 앉아 있던 선배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응, 나도 봤어. 검은 털에 흰 양말 신은 것처럼 생긴 녀석 말이지? 우리 대피소 주변에 자주 나타나는 애야. 불만 안 나면, 저 아래 마을에서 밥 얻어먹고 다니더라.”
그 고양이는 몇 해 전부터 이 산 주변을 떠나지 않고 맴도는 떠돌이였다. 마을 사람들은 조용히 “산지기”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고, 소방관들도 종종 순찰 중에 마주치면 인사를 건네곤 했다.
“불이 나면, 얘도 무섭겠죠?”
유진이 문득 중얼거리듯 말하자, 대장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더니 이렇게 답했다.“그래서 빨리 불 끄고 내려가는 거야. 사람만 지키는 게 아니라, 이 산에서 사는 것들도 같이 지키는 거거든.”
그 말을 들은 유진은, 잠깐 시야가 흐릿해질 만큼 피곤해져 있던 눈을 다시 크게 떴다. 자신이 지키려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이, 피곤함 너머에 묵직한 책임감으로 다가왔다.
며칠간 이어진 산불이 마침내 완전히 꺼졌다는 소식이 전해진 날, 소방서에는 드물게도 긴 숨이 흘렀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번 불이 마지막이 아닐 거라는 것을. 가을은 여전히 남아 있고, 낙엽은 더 많이 말라 있을 것이며, 바람은 또 다른 방향에서 산을 훑고 지나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은 휴식은 소방관들에게 소중했다. 비로소 방화복을 완전히 벗어 세탁기에 넣을 수 있었고, 산에서 묻어온 흙과 재를 물로 씻어낼 수 있었다. 장비를 닦는 손길은 여전히 바빴지만, 어느새 서로의 농담에도 짧은 웃음이 섞여 들었다.
신참인 유진은 그날, 처음으로 소방서 옥상에 올라가 도시의 밤을 내려다봤다. 산불이 나지 않은, 평범한 밤의 냄새가 났다. 식당에서 끓여 오는 라면 향, 멀리서 들려오는 버스 브레이크 소리, 그리고 가끔 들려오는 오토바이 엔진 소리까지. 평범한 도시의 숨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감사하게 느껴졌다.
그때, 옥상 문이 열리며 대장이 올라왔다. 손에는 종이컵 두 개와 따뜻한 커피 한 병이 들려 있었다. 대장은 별 말 없이 컵에 커피를 나누어 따르고, 옥상 난간에 기대어 섰다.
“올가을 첫 산불 치고는, 꽤 큰 편이었어. 그래도 사람 다친 일 없이 끝나서 다행이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장님은, 이렇게 매년 가을마다 산불 나면… 안 지치세요?”
대장은 잠시 말을 멈추고 도시 불빛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웃으며 대답했다.
“지치지 않는 사람이 어딨어. 대신, 지칠 때마다 다시 힘을 주는 사람들이 있는 거지. 오늘 낮에 체육관에서, 할머니가 내 손 잡고 고맙다고 하시더라. 그 손 한번 잡혀 보면, 또 한 해 더 버틸 힘이 생겨.”
유진은 그 말을 들으며 문득 자신이 떠올렸다. 산불 출동 첫날, 너무 긴장한 나머지 장비 점검을 두 번이나 반복하며 선배들께 번거로움을 끼쳤던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엔 다 그래”라며 등을 토닥여 주던 손길들. 그것 또한 자신에게 힘을 주는 따뜻함이었다.
가을이 깊어가며 산불 신고는 조금씩 줄어들었지만, 소방관들의 긴장은 완전히 풀리지 않는다. 이제는 건조해진 도시 골목의 작은 불씨들, 난방기기로 인한 화재, 그리고 추워진 날씨에 늘어나는 구조 요청까지, 계절에 따라 변하는 위험들은 언제나 새로운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을 산불 시즌이 지나면 소방서 안에는 묘한 정서가 남는다. 함께 산을 올랐던 기억, 어둠 속에서 불빛 하나씩 나눠 들고 서로를 확인하던 밤, 그리고 대피소에서 마주친 이름 모를 사람들의 눈빛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어느 날, 소방서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봉투 앞면에는 삐뚤한 글씨로 “산불 끄러 온 소방관 아저씨, 이모께”라고 적혀 있었다. 안에는 사진 한 장과 짧은 편지가 들어 있었다. 사진 속에는 작년 가을, 불이 나지 않았던 어느 날 산에서 찍은 한 가족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 뒤로 펼쳐진 숲은 아직 무사했고, 아이의 웃음은 크게 번져 있었다.
“작년에 우리 산에 불 났을 때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올가을에도 우리 가족이 같은 자리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어요. 소방관 아저씨, 이모들도 올해 가을에는 꼭 웃는 사진 많이 찍으세요.”
편지를 읽던 대원들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한동안 아무도 자리를 뜨지 못했다. 누군가는 괜히 시계를 확인하는 척 눈가를 훔쳤고, 누군가는 장비 정리하러 간다고 말만 남기고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한구석에는, “그래, 우리는 누군가의 사진 배경을 지키는 사람들이구나”라는 인식이 새롭게 자리 잡았다.
가을의 끝자락, 단풍은 거의 떨어지고 산은 겨울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한다. 나뭇가지는 조금 더 앙상해지고, 숲속 바닥에는 바스락거리는 낙엽 대신 서늘한 흙 냄새가 스며든다. 산불의 흔적이 남은 자리는 아직 검게 그을려 있지만, 그 사이 사이로 벌써 작은 새싹들이 고개를 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현우는 휴무 날, 일부러 그 산을 찾았다. 불이 났던 골짜기 옆, 산길 초입에서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숨을 들이켰다. 매캐한 냄새 대신, 차가운 바람이 폐 깊숙이 들어왔다. 하늘은 높고 맑았고, 멀리서 아이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산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자, “입산 시 화기 금지”라는 팻말 옆에 누군가 작은 손글씨로 적어 놓은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 숲은 우리가 함께 지키는 약속입니다.”
현우는 그 문장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산불을 막는 일은 소방관들만의 몫이 아니다. 산을 찾는 모든 사람의 배려와, 작은 습관 하나가 모여 만들어지는 결과였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항상 현장에서 “불씨 하나만 잘 정리해도, 오늘 밤은 조용해질 수 있습니다”라고 사람들에게 반복해서 설명했다.
산을 내려오는 길, 현우는 나뭇가지 사이로 흘러드는 빛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었다. 언젠가 또 다른 가을에, 또 다른 산에서, 비슷한 싸움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도 오늘을 떠올리며, 다시 장비를 챙기고 산길을 오를 것이다.
소방서에는 계절마다 조금씩 다른 풍경이 있다. 봄에는 산악 구조 훈련과 강풍 속 화재 대비 훈련이, 여름에는 폭우와 침수에 대비한 구조 훈련이 늘어난다. 그리고 가을, 산불 대비 훈련은 매년 반복되지만, 그 속에 담긴 마음가짐은 매해 조금씩 달라진다.
한 번 큰 산불을 겪고 나면, 소방관들은 그해 가을을 기억한다. 어떤 바람이 불었는지, 어느 지점에서 불길이 갈라졌는지, 어느 골짜기에서 연기가 유난히 자욱했는지. 그 기억들은 다음 해, 그다음 해의 대응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그렇게 누적된 경험 위에 새로운 세대의 소방관들이 합류하고,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쌓아 올린다. 그 과정 전체가, 결국 한 사람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긴 준비의 연속이었다.
유진은 훈련장 한쪽에서 호스를 정리하며 생각했다. 자신이 이 일을 선택한 이유는, 교과서에서 본 멋진 사진들 때문도, 영화 속의 화려한 장면들 때문도 아니었다. 어릴 적 자기 동네에서 작은 화재가 났을 때, 어두운 골목으로 망설임 없이 뛰어 들어가던 소방관 한 사람의 뒷모습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냥 “멋있다”고만 생각했지만, 이제는 안다. 그 뒷모습이 멋져 보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두려움을 이겨내야 했는지, 얼마나 많은 새벽을 깨워야 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손을 잡아야 했는지를.
그래서 유진은 다짐했다. 언젠가 자신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 “가을 산불이 나던 날, 길을 밝혀 주던 사람”으로 남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가을이 끝나갈 무렵, 도시는 겨울 장비를 꺼내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두꺼운 코트를 꺼내 입고, 카페 메뉴판에는 뜨거운 음료가 더 많이 자리 잡는다.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장식을 준비하는 손길이 분주히 오간다. 그런 변화 속에서도, 소방서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잠깐씩 고개를 들어 붉은 출입문을 바라본다.
누군가는 지나치며 짧게 인사를 건넨다.
“수고하세요.”
그 한마디에 소방관들은 언제나 정성껏 대답한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겉으로 보기엔 아주 짧고 평범한 인사지만, 그 안에는 서로에 대한 신뢰가 들어 있었다.가을철 잦은 산불 속에서도, 소방관들이 끝까지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은 어쩌면 이 평범한 하루일지도 모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뉴스에 나오지 않는 날, 누구도 긴급 전화를 할 필요가 없는 밤, 가족끼리 웃으며 저녁 식탁을 둘러앉을 수 있는 시간. 그 평범함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는 가을밤 산 속에서 빨갛게 물든 불길을 향해 나아간다.
가을은 매년 찾아오지만, 매해 조금씩 다른 색으로 남는다. 어떤 해에는 단풍의 색으로, 어떤 해에는 함께 걸었던 산책로의 냄새로, 그리고 또 어떤 해에는, 산불 속에서 서로를 지켜내던 소방관들의 이야기로.
그렇게 우리의 가을은, 조금씩 더 따뜻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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